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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이어, 한 달 만에 제주도에 또 다녀왔다. 갈 때마다 제주도가 KT의 CF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혹시 "인터넷에 올리면 주문이 들어와요" 식의 장밋빛 환상이 제주도민들을 사로잡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달 내가 묵었던 펜션에서는 주인아주머니께서 아침마다 창문을 두드려 깨우며 "누룽지가 있는데 드실래요? 된장찌개가 있는데 같이 아침 먹을래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전날 술을 먹었다거나, 아침부터 일정이 바빠 애써 사양했지만 인심은 참 좋았다. 그리고 그 펜션을 떠나는 날, 주인 내외분께서는 직접 집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줬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내 목에 걸린 카메라까지 받아다가 우리 부부를 찍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배경이 이 펜션의 예쁜 전면이었다. (여기 올린 사진에는 빼놓았지만,) 전화번호와 펜션이름이 크게 새겨진 간판이 아주 잘 드러난 상태였다. 인터넷을 타고, 제주여행 후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이 펜션이 알려질 수 있도록 의도한 듯이.

해안도로를 달리다 눈에 뜨인 갈치조림 집에 무작정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을 때였다. 갈치조림은 무척 맛있었고, 쓰러져가는 듯한 낡은 가게 풍경이 성산포 풍광하고 운치있게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잘 먹고 났더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뭘 보고 왔어요?" "그냥 차 몰고 달리다 대충 들어왔는데요?" "아유, 여긴 인터넷이나 신문 보고 많이들 찾아오는 곳인데." 지금 이분들에게는 인터넷 홍보전략이 체화돼 있고, 고객 반응 확인이 생활화 돼 있다. 인터넷 경제가 제주도민 전체에게 경영 마인드라도 심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탓에 좀 어색하고 곤란한 상황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우후죽순 생겨난 수많은 펜션들이 제각기 경쟁적으로 광각렌즈를 사용해가며 예쁜 정원과 벤치, 멀리 떨어진 바다를 보여주다보니 수많은 펜션들이 하나같이 비슷해져 가고, 사진으로볼때면 모두가 똑같아 보인다. 정원이 있고, 꽃이 있고, 바다가 (멀리) 있고. 정말 좋은 곳은 어디인지 궁금해서 입소문이라도 보려고 들면 어김없이 광고성 글만 검색된다. 네이버나 다음에 '제주 펜션'을 쳐보면 키워드 광고만이 우루루 떠올라서 스크롤을 수없이 해야 하고, 모든 펜션들이 서로 '특별히 친절하고, 특별히 예쁘고, 특별히 교통이 편하다'고 자랑해대는 탓에, 오히려 전반적인 불신이 생긴다. 제주도의 펜션 수준은 유럽의 펜션하고 비교하면 호텔급이라고 할 정도인데도, 뭐랄까, 이건 일종의 플라스틱 신드롬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이번 제주도 출장길에서 만난 펜션 주인들은 "1년 동안 열심히 펜션 운영해봐야 기본 비용 빼고, 포털에 내는 검색광고비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대곤 했다. 포털의 키워드 광고에 펜션들이 몰리다보니, 키워드 경매가격은 날로 치솟고, 1년 전에 클릭당 300원~1000원이던 경매가가 요즘은 비싸면 1만원까지 뛴다는 것이다. 100만 원을 광고비로 내놓으면 적어도 1000회 이상 노출되던 광고가 10분의 1도 안 되게 노출 빈도가 줄어들다보니, 실제 비용 지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게다가 인터넷에 발품만 열심히 팔면 각종 할인 및 결합상품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품을 제공하는 곳은 제주여행 관련 카페들. 광고 효과가 떨어지다보니, 이윤을 줄여서라도 실제 구매로 연결시켜준다는 카페 등에 펜션이나 맛집, 렌터카 업체 등에서 열심히 혜택을 주는 것이다.(나부터도 이런 카페를 이용하곤 했다.)

펜션과 식당을 만들고, 그들이 말하는 '육지 사람들'에게 서비스와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은 제주도민들인데, 정작 여기서 이런 상품을 중개하고 큰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제주도민이 아닌 육지 사람들이다.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가 한없이 늘어날 것만 같던 인터넷이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제주가 보여주는 인터넷 경제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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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디 오브라이언이 죽었을 때 조문객들은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그의 관에 돈을 던졌다. 그날 장례식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던 구두쇠도 참석했다. 그 또한 비통한 표정을 짓고 패디의 묘 앞에서 외쳤다. "난 패디 오브라이언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을 보이겠어요. 여러분이 여기에 돈을 얼마를 던져 넣든지간에 난 그 돈의 두 배를 내겠습니다." 구두쇠는 약간 취한 것처럼 보였고, 마을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이 구두쇠에게 한 번 교훈을 얻게 해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문객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지폐와 동전을 모두 관 속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던져 넣은 돈은 3012달러. 이 마을에서 장례식이 벌어진 이래로 가장 많은 액수의 저승길 노잣돈이었다. 그러자 구두쇠는 관 속에서 그 돈을 긁어 모았다. 그리고 패디 오브라이언 앞으로 6024달러 짜리 수표를 한 장 쓴 뒤 관 속에 던져 넣었다.

아일랜드에도 동양과 비슷하게 저승길 가는데 노잣돈을 마련해 주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풍습이야 평소 알 길이 없었지만, 약삭빠른 구두쇠 영감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수완 만큼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야 물론 저렇게 타락해서 살지는 말라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장례를 치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조문객들의 슬픔과 고인에 대한 경건한 추모를 이용해 그 뒤편으로 한 몫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지난해 10월 첫주판에 보면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지난해 사망자 수는 24만5511명(보건복지부 자료). 이 중 화장한 건수가 전체의 52.59%(통계청 자료)로 12만9138건이다. 따라서 지난해 화장 시 총 소요비용은 1조547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매장 시 총 소요비용 1조9224억원을 더하면 지난해 장묘산업 규모는 3조5000억원에 육박한다.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한국의 온라인게임 시장 규모가 아마 이 정도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1~2년 전만 해도 이 돈이면 NHN을 통째로 살 수도 있었다.

저승길에 노잣돈을 챙겨주는 풍습 자체야 별로 탓할 게 없다. 하지만 한번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병원 장례식장에 가면 정말 허접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베니어합판으로 된 관을 하나 두고는 그것보다 훨씬 비싼 관들을 같이 판다. 절대 강매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던 가족을 마지막 보내는데 베니어합판으로 된 관을 선뜻 선택할 유족은 없다. 얼마 안 가 썩어 없어질 수의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4000만 원 짜리 '명품 수의'까지 팔린다는데 그런 걸 보면 부자들은 죽어서 재산을 무덤까지 가져가려는 모양이란 생각도 들곤 한다.

그나마 많이 장례문화가 개선돼 이 정도다. 아직도 매장을 하려면 관을 묻고 무덤을 밟아주는 인부들에게 잘 밟아달라고 1만 원 짜리 지폐를 수십 차례 꺼내 찔러줘야 하고, 화장터에서도 잘 태워 달라고 돈을 찔러줘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모양이다.

기쁜 날, 합리적으로 축하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결혼식이나 돌잔치의 거품은 조금씩 줄어드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픈 날 합리적으로 슬퍼하자고 말하긴 힘들다. 최근에는 다행히 웨딩플래너처럼 장례지도사라는 직업도 등장한 모양이지만, 솔직히 주위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써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훌륭한 장례지도사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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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는 정말 대단한 작물이었다. 그저 아무 곳에나 심어놓으면 혼자 알아서 자라줬다.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정성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태풍이 몰려와 옥수수대를 모두 휩쓸어가지만 않도록 기도만 하면 됐다. 더욱이 자라기도 빨리 자랐다. 순식간에 키가 커져 먹을만해지는 이 작물은 2모작이 아니라 3모작, 4모작도 가능했다.

마야, 잉카, 아스텍 등 중남미의 어마어마한 고대 문명은 옥수수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저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자라나는 옥수수 덕분에 먹고 살 걱정이 사라진 고대 왕국은 남는 시간을 어마어마한 피라밋을 건설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는 데 사용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옥수수는 여전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자라는 작물이다. 기후 조건을 심각하게 따지고, 농부의 노동에 비례해 성장해 주는 밀과 쌀 등의 고약한 작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옥수수는 늘 값이 저렴했고, 흔하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옥수수값이 급격히 오르고 있다.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나라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옥수수가 석유를 대신할 바이오연료의 원료로 각광받기 시작해서다. 미국 농지의 가격이 모처럼 폭등하고, 옥수수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바이오연료의 장점은 바이오연료의 원료인 식물이 재배되는 동안 대기중의 온실가스를 흡수함으로써 나중에 연료로 쓰일 때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미리 벌충한다는 데 있다. 화석연료야 꺼내쓴 만큼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늘릴 뿐이지만, 바이오연료는 자기가 배출할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온실가스를 스스로의 일생 중에 먹어치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었다. 바이오연료를 사용하면 돈도 아끼고, 환경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세계 각국은 수소연료나 태양열연료 등 신에너지 보급 이전 단계로 바이오연료 보급 계획을 앞다퉈 내놓았다.

문제는 그 계획들이었다. 정부가 바이오연료 사용량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옥수수, 유채꽃, 사탕수수 등 바이오연료용 작물들의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각국 정부는 생산량과 예측 수요를 따져봤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예측은 틀렸다. 지금 현재의 낮은 가격은 공급이 수요를 훨씬 앞질러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요공급의 균형 상태까지 보급하겠다는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작물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각국 정부의 바이오연료 도입 계획은 수정 단계에 접어든다. 보급 속도를 늦추고, 바이오연료 사용비율을 줄이는 방식으로 수요 증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때맞춰 경고도 나왔다. 지금처럼 바이오연료용 특화작물에 집중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바이오연료용 작물의 가격이 상승하면, 그 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운반비용 등이 또다른 온실가스 배출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물성 기름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환경산업은 제3의 산업혁명"이라는 구호를 내놨다.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10년 이상 전부터 반복됐던 얘기다. 하지만 제3의 산업혁명의 진행 과정을 보면, 말이 자꾸 앞선다. 인센티브는 아직 불투명하고, 기업과 정부의 계획은 정교하지 못해서 실행단계에서 계속 비틀거린다. 그래도 이쪽이 변화의 방향이란 생각은 든다. 이 혁명은 언제쯤 양질전환을 일으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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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이란 말이 있다. '팡세'의 저자인 그 프랑스인 파스칼이 도대체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봐야 할까? 파스칼은 무조건 신을 믿(는 척 하)는 것이 올바른 의사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1.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할 때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2.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을 때 잃을 것이 없다.
3.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할 때 얻을 것이 없다.
4.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을 때 잃을 것이 없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으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잭 그리고 수지 웰치 부부가 최근 비즈니스리뷰에 칼럼을 썼다. 파스칼의 도박에 관한 글이지만, 사실 진짜 주제는 기업들이 지구온난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친환경적인 경영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생산라인을 바꿔야 하고, 관리를 철저히 해야하며, 신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비용은 많이 드는데 효과는 미미하다. 환경문제라는 말만 꺼내면 "그거 돈도 안되잖느냐"며 고개를 내젓는 CEO가 세상에는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치 부부의 해답은 단순명료하다. 친환경 경영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이익이란 것이다. 불과 30년 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미국 기업의 화두로 떠올랐을 때 미국 공장들은 자신들보다 더 싸게 값을 부르는 멕시코와 아시아의 공장을 무시하고는 "우리 기술이 더 뛰어나니까"라는 근거없는 망상 속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일자리도 함께 사라졌다.

미국에 살고 있지 않아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웰치 부부는 그동안 환경론자들의 지구온난화 주장에 대해 '생각보다 과장돼 있을 수 있고,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여왔던 모양이다. 환경론자들의 비난이 꽤 거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환경문제는 캠페인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일어나야 효과를 볼텐데,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효율적인 시스템은 시장경제 아래에 있는 기업들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웰치 부부의 얘기는 꽤나 합리적이고 설득적이다.

비즈니스위크 원문은 유료회원이 아니라 그런지 못 구하겠고, 발췌문은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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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이끌어가는 기본 동력은 '인센티브'다.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물질적 인센티브가 근면한 노동자를 만들어내고, '기업이 사회를 위해 환경보호에 힘쓰고 불우이웃을 도우면 사회는 기업을 존경하게 된다'는 정신적 인센티브가 기업으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한다. 적절한 인센티브는 활발한 생산과 합리적 분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유독 이런 적절한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는 합리적인 생산과 분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로 장기기증 분야 얘기다. 장기를 기증하면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말 자체는 뭔가 음험하게 들린다. 실제로 최근 외신을 보면 파키스탄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신장이 하나밖에 없는 주민이 마을 전제 인구의 40~50%에 이른다고 한다. 장기를 제공했을 때 물질적 인센티브(미화 2500달러)를 주는 브로커들의 장사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장기 거래는 불법이며, 장기 기증에 대한 물질적 보상도 역시 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장기를 기증하면 돈을 주는 대신 박수를 쳐 준다. 정신적 인센티브를 줘서 장기기증을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센티브는 2500달러라는 물질적 인센티브보다 훨씬 적은 모양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늘 장기 기증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이 제한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공급은 매우 제한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수요는 전혀 제한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선진국 사람들은 후진국 사람들의 장기를 기증받고, 장기를 기증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얌체같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뇌사 후 장기 기증'에 동의한 이타적인 사람들의 장기를 기증받는다. 전혀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다.

다행스럽게도 상황을 해결할 혁신적인 방법이 최근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라이프 셰어러즈(http://www.lifesharers.org/)는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킨다. 물질적 인센티브는 장기 밀매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가입비는 없다. 대신 회원들은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이 경우 회원의 인센티브는 유사시 다른 회원으로부터 장기를 기증받을 수 있는 우선권을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뇌사 회원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다른 회원이 없다면 장기는 비회원에게 기증된다.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이 먼저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자는 간단한 방법이다. 궁극적으로는 라이프 셰어러즈의 회원이 늘면 늘수록 장기 이식을 받을 확률이 늘어난다는 사회적 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

암웨이의 창업자 리차드 디보스의 방법도 파워풀하다.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할 때의 부작용이 개인간 이뤄지는 불법적인 장기 밀매라면, 물질적 인센티브를 개인이 제공할 수 없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돈은 개인 대신 보험사가 내고, 그 수혜는 장기 기증자가 받으면 된다는 얘기다. 디보스는 뇌사자가 장기를 제공하면 보험사로 하여금 장기 기증자가 생전에 지명한 사람에게 1만 달러씩을 주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러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기 기증자가 자신이 지명한 후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산을 남길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장기를 사고 팔 수 없기 때문에 밀매의 부작용도 최소화된다. 또 이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 보험사로서도 이익이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병원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보험사가 부담해야 하는 의료보험비는 1만 달러의 수십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인센티브를 준다면 장기기증자가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장기기증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건 아마도 이 분야 행정관료들에게 경제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얀거탑이란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 마지막회에 장기기증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때마침 이 덕분에 장기기증에 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다는데, 이런 때일수록 한번쯤 장기기증에 관한 인센티브를 생각해 봤으면 싶다.

Posted by 흰솔
그 상자는 늘 거기에 있었다.

그 상자의 이름은 FTA. 그 상자를 발견했을 때 옆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왼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은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상자를 열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상자를 열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른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은 상자를 열라고 유혹했다. 그 안에는 보물이 담겨 있을 것이며, 그 상자를 여는 순간 우리의 삶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2일 오후 1시. 결국 상자는 열렸다.

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고,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가진 무역대국이다. 이 정도 규모의 두 나라가 관세와 비관세 분야의 시장을 대규모로 개방하는 FTA는 일찌감치 없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의 규모가 한미 FTA보다 크지만, 이건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개국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다. EU도 관세가 없는 경제동맹체긴 하지만 유럽 지역 수십개국이 참여했으니 한미 FTA와는 다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미국도 모른다.

충격이 온다면 그건 한국 경제에 올 가능성이 크다. 경제규모가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판도라의 상자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은 한미 FTA 타결로 앞으로 언젠가 가능할 수 있는 시나리오인 일본이나 중국과의 FTA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어차피 지금 미국 경제구조로는 제조업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자동차는 일본이나 한국이 만드는 게 낫고, TV도 마찬가지다. 옷을 만들려고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런 건 싸게 잘 만드는 나라에서 수입하면 된다. 미국은 대신 서비스업과 농업에서 승부를 걸었다. 법률 및 의료, 교육 시장을 개방하기로 했고, 농업분야에서도 한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머리는 미국이 쓸테니 몸은 한국이 열심히 놀리라는 투다. 1인당 경작면적이 한국과 비교도 되지 않게 광활하게 넓은 미국의 농업 기업은 한국의 영세 농업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국 농업은 최소 투자로 최대한의 생산을 얻어내는 첨단 산업이다. 농민의 땀방울 88알을 생각하며 쌀 한톨을 고맙게 먹는 한국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다. 한국 농가에게 한미 FTA가 재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국은 또 환경과 노동,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성과를 얻어냈다. 한국이 미국 수준의 환경 및 노동 관련 제도를 갖추려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만만찮다. 지적재산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명분'에서 뒤져 반대를 할 수 없었지만 이런 식의 명분을 강조하는 게 바로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표적인 비관세장벽이다. 키가 180cm인 성인이 150cm인 중학생에게 똑같은 출발선에서 달리자고 한다면, 그게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한다면, 명분은 동의하지만 불평등한 것은 당연하니까. 그래도 한국은 미국에게 이 부분을 양보했다. 미국은 앞으로 이어질 아시아 국가와의 FTA에서 한국의 전례를 당당히 들이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도 지식산업 중심으로 변해가야 한다. 이 나라는 자원도 없는 작은 땅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지식산업밖에 없다고 수십년을 외쳐왔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세계 최고의 미국 서비스산업과 경쟁한다면 한국 서비스 산업의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충격 없이 변화는 없으니까. 농업은 사실상 패배다. 하지만 협상이란 원래 주고받는 것이다. 식탁을 내주고 다른 것을 얻어내는 방식에 대한 반대는 많지만, 아직도 농가천하지대본만 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은 대신 자동차 분야에서 긍정적인 양보를 얻어냈다. 섬유 협상도 진전을 이뤘다. 모두 한국이 당장 과실을 따낼 수 있는 분야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던 그 때처럼 수없는 질병과 고통이 한국 경제의 앞날에 잔뜩 쏟아져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상자를 열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하던 판도라는 아직 남아있는 한 가지를 보고 안도한다. 희망이었다. 상자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과연 어떤 것일까. 혹시, 우리는 지금 질병과 고통에는 애써 눈감고 희망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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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가 2006년 4월 "미국 경제에 끼치는 벌레의 경제 파급효과가 570억 달러(약 57조 원)"라고 보도했습니다.

57조 원이면 외환은행을 8개 정도 살 수 있는 돈입니다. 롯데그룹 전체의 1년 매출도 그쯤 되겠군요.

AP는 "이것도 보수적으로 낮춰 추산한 것"이라며 "꿀과 비단 등 곤충이 만들어내는 직접 상품은 포함시키지 않았고 야생 곤충의 효과만 추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보도 내용을 약간 옮겨보죠. 어떻게 계산했는지.

1. 야생동물의 영양공급원: 야생동물을 관찰하거나 사냥하는데 드는 비용 가운데 이 야생동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먹이로서의 곤충의 값 500조 원.
2. 해충컨트롤: 해충 피해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익충이 사라졌을 경우 늘어날 예상 피해로 추산한 결과 약 4조5000억 원 이익.
3. 식물 꽃가루 운반: 야생 곤충이 짝을 맺어주는 곡물(양봉 벌 제외)의 경제적 가치 약 3000억 원.
4. 거름: 분뇨를 치워주는 곤충이 없다면 농가에서 파리와 기생충이 크게 늘어날 것. 또 곤충은 분뇨를 땅에 거름으로 되돌려주는데 이런 곤충이 없다면 농가의 거름값도 크게 늘 것. 경제적 가치 약 3800억 원.

뭐 이렇다는 겁니다. 물론 꿀과 비단 외에도 해충들 덕분에 고용이 창출되는 '세스코'같은 회사의 경제적 가치도 판단하지 않았을테고, 화학회사의 살충제 판매 이익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요점은 우리가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누군가를 부르려면 벌레들이 얼마나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의 가치도 따져줬으면 좋겠어요. 벌레와 정치인 사이에 더 가치있는 게 뭔지 좀 알 수 있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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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포스팅을 이사시키는 중.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