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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5 139의 저주 3
  2. 2007.06.26 addicted to the printed 3
토끼머리2007. 8. 15. 21:08
회사 도서관에서 책 8권을 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신 터라 무단으로 들고 나왔다. 나같은 사람들이 책을 가져갈까봐 회사에서 몹시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책 날개와 하드커버를 무지막지한 이삿짐용 셀룰러 테이프로 붙여놓고, 분류기호 표시 스티커를 책등에다 붙인 것으로도 모자라 책 옆 모서리와 윗 모서리마다 회사 이름을 콱콱 스탬프로 찍어놓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화룡정점이 있었으니...

139페이지까지 책을 읽어나가면 꼭 스탬프로 날인된 회사 심벌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139, 하필이면 왜 139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이 숫자가 참 묘하다. 우선 13이라는 불길한 숫자로 시작된다. 또 1+3=4로, 이 또한 불길한 숫자이며, 1+3+9=13이라서 역시 불길한 숫자다. 1*3*9=27인데, 이는 또 2+7=9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한마디로 책을 훔쳐가면 불길함에서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저주가, 마치 뫼비우스의 고리마냥 책마다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은 집에 시중에서 절판돼 구할 수 없는 회사 책을 한 권 무단으로 보유하고 있다. 절판된 책이라 뻔뻔스럽게도, 장기대출중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변명 하에 여전히 들고 있었다. 139의 저주를 알아버린 지금, 빨리 반납하든지 돈으로 해결하든지 해야겠다. 아, 사서의 센스가 무섭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6. 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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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함께 얘기하고, 함께 술을 마실 때면 김영하의 스타일을 술자리 안주로 삼으며, 가방 속에는 늘 뭔가 책이 한 권 들어 있어 읽을 거리가 없는 상대방에게 꺼내 줄 수 있는 그런 여자를.

하지만 커피숍의 여자들은 책보다는 거울을 꺼내는 경우가 더 많았고, 도서관의 여자들은 고시 문제집이나 영어 문제집을 들고 다녔으며, 지하철의 여자들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정말 많은 여자들이 취미를 독서라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책은 뭔가요, 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곤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6개월 전에나 유행했던 베스트셀러의 이름을 웅얼거리곤 했다. 그는 그네들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던지라 더 당황하곤 했다. 그는 단지, 책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책과 책꽂이를 사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고, 책꽂이 분류법을 고민하면서 희열을 느끼며, 비어있는 책꽂이를 기필코 채워넣고야 말던 그는, 사람들과 만나면 할 얘기가 없었다. 사람들과 만나면 그가 꺼내는 말은 이런 거였다. 난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부분이 나오면 귀퉁이를 접어둬. 나중에 그 부분들을 다시 펼쳐 읽게 되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다시 그 책을 펼쳐 본다면 꼭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거든. 난 책을 험하게 다뤄. 침대에서도 읽고, 감자칩을 먹으면서 기름기 묻은 손으로도 책장을 넘겨. 손에 펜이 있다면, 뭘 쓰기도 하고, 밑줄도 긋고. 두꺼운 책은 귀퉁이만 접어서는 다시 그 부분을 찾기 힘들어서 아예 책장을 반으로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어. 물론 베개로도 쓰고, 라면냄비 받침으로도 쓰지. 오타에는 또 얼마나 민감한데. 공중화장실에서라도 오타가 보이면 펜을 꺼내 고쳐써놓고 나온다니까. 하지만 초판1쇄의 책에서 오타를 발견하면 기뻐. 수정되기 전의 소소한 실수와 함께 한 것 같아서 뭔가 내가 책을 소유하게 된 것 같아. 그가 기대한 건, 이런 말을 꺼내면 책을 어떻게 접을 수 있냐, 책에 뭔가를 쓰다니, 나도 오타는 싫어하는데 등의 맞장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책 같은 거 안 봐도 살 수 있잖아. 1년 동안 한 권도 안 읽어도 멀쩡한걸 뭐. 난 소설은 안 읽어. 도움이 안 되거든. 그 시간에 실용서를 봐야지. 하지만, 물론 그들은 실용서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가 알지 못하는 연예인과, 화장법과, 패션과, 물 좋은 클럽에 대한 대화로 넘어가곤 했다. 그는 책이 없으면 잡지를 보고, 잡지가 없으면 신문을 보고, 신문이 없으면 지하철의 광고판 문구라도 읽어내고야 마는데, 그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와 달리 책을 사는 대신 도서관에서 빌려봤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다고 했으며, 해리포터에 열광하고,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책꽂이가 부족한데도 책도 아닌 프린트조차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고, 읽을 책만 준다면 검정 노트북컴퓨터로 뭔가를 끄적거리는 그의 옆에서 한시간도, 두시간도 기다려준다.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난 그는 요즘 행복하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