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자는 늘 거기에 있었다.

그 상자의 이름은 FTA. 그 상자를 발견했을 때 옆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왼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은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상자를 열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상자를 열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른쪽 편에 서 있던 사람은 상자를 열라고 유혹했다. 그 안에는 보물이 담겨 있을 것이며, 그 상자를 여는 순간 우리의 삶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2일 오후 1시. 결국 상자는 열렸다.

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고,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가진 무역대국이다. 이 정도 규모의 두 나라가 관세와 비관세 분야의 시장을 대규모로 개방하는 FTA는 일찌감치 없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의 규모가 한미 FTA보다 크지만, 이건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개국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다. EU도 관세가 없는 경제동맹체긴 하지만 유럽 지역 수십개국이 참여했으니 한미 FTA와는 다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미국도 모른다.

충격이 온다면 그건 한국 경제에 올 가능성이 크다. 경제규모가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판도라의 상자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은 한미 FTA 타결로 앞으로 언젠가 가능할 수 있는 시나리오인 일본이나 중국과의 FTA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어차피 지금 미국 경제구조로는 제조업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자동차는 일본이나 한국이 만드는 게 낫고, TV도 마찬가지다. 옷을 만들려고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런 건 싸게 잘 만드는 나라에서 수입하면 된다. 미국은 대신 서비스업과 농업에서 승부를 걸었다. 법률 및 의료, 교육 시장을 개방하기로 했고, 농업분야에서도 한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머리는 미국이 쓸테니 몸은 한국이 열심히 놀리라는 투다. 1인당 경작면적이 한국과 비교도 되지 않게 광활하게 넓은 미국의 농업 기업은 한국의 영세 농업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국 농업은 최소 투자로 최대한의 생산을 얻어내는 첨단 산업이다. 농민의 땀방울 88알을 생각하며 쌀 한톨을 고맙게 먹는 한국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다. 한국 농가에게 한미 FTA가 재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국은 또 환경과 노동,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성과를 얻어냈다. 한국이 미국 수준의 환경 및 노동 관련 제도를 갖추려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만만찮다. 지적재산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명분'에서 뒤져 반대를 할 수 없었지만 이런 식의 명분을 강조하는 게 바로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표적인 비관세장벽이다. 키가 180cm인 성인이 150cm인 중학생에게 똑같은 출발선에서 달리자고 한다면, 그게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한다면, 명분은 동의하지만 불평등한 것은 당연하니까. 그래도 한국은 미국에게 이 부분을 양보했다. 미국은 앞으로 이어질 아시아 국가와의 FTA에서 한국의 전례를 당당히 들이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도 지식산업 중심으로 변해가야 한다. 이 나라는 자원도 없는 작은 땅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지식산업밖에 없다고 수십년을 외쳐왔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세계 최고의 미국 서비스산업과 경쟁한다면 한국 서비스 산업의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충격 없이 변화는 없으니까. 농업은 사실상 패배다. 하지만 협상이란 원래 주고받는 것이다. 식탁을 내주고 다른 것을 얻어내는 방식에 대한 반대는 많지만, 아직도 농가천하지대본만 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은 대신 자동차 분야에서 긍정적인 양보를 얻어냈다. 섬유 협상도 진전을 이뤘다. 모두 한국이 당장 과실을 따낼 수 있는 분야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던 그 때처럼 수없는 질병과 고통이 한국 경제의 앞날에 잔뜩 쏟아져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상자를 열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하던 판도라는 아직 남아있는 한 가지를 보고 안도한다. 희망이었다. 상자가 열린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과연 어떤 것일까. 혹시, 우리는 지금 질병과 고통에는 애써 눈감고 희망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