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2007. 4. 2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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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레마두라는 스페인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건조하고, 더위가 멈추지 않으며, 추울 땐 가차없는 곳. 어원을 따져보면 EXTREMADURA라는 말 자체가 '지나치게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 이런 험악한 곳에서 성숙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코르테 레알은 엑스트레마두라와 상당히 닮아 있다. (사실은, 엑스트레마두라 산 와인이란 표시만 보고 별 생각없이 골라 들었다.) 밸런스가 무척 좋은데, 그것도 적당히 자리잡은 밸런스가 아니라 아주 강한 서로 다른 특징들이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만들어낸 밸런스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와인은 타협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지긋지긋한 전쟁 끝의 종전협정과 같다. 그렇다보니 딱히 흠을 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일관 느껴진다.

그런데도, 뭔가 아쉽다. 좋은 향과 부드러운 첫 느낌, 목을 넘길 때까지의 맛은 그랑크뤼 3~4등급 정도는 우스워 보일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뒷 맛이 씁쓸하고 시다. 덜 숙성된 것도, 산화가 된 것도 아닌 포도 자체의 신맛 같은데 몹시 거슬린다. 사실 거슬린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거슬리는 신맛은 아니다. 그래도 너무 완벽한 긴장이 한 순간에 깨어지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소매점 가격이 2만 원 대. 가격 대비로는 거의 최고급에 속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인데, 불행히도 마지막 뒤끝이 사람들의 인상을 구긴 모양이다. 별로 샵에서 인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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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노가 자랑하는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한국에서의 인기는 거의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이 20달러를 넘지 않으며(일반적으로 13~14$에 팔리는 듯) 국내 수입가격도 거품을 대충 제거하면 2만원대 초반(또는 2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

더구나 키안티 클라시코다. 저 욕심많고, 따지기 좋아하며, 혼자만 잘 되려고 하는 (한국인과 아주 흡사한) 이탈리아 포도 농부들이 싸우고 싸워 따낸 것이 키안티 '클라시코'다. 근처에 있다고 다 키안티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안동 반경 50km 이내에서 안동소주를 만든다고 그게 과연 진짜 안동소주겠느냐는 것과 같은 논리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클라시코'는 '원조'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_-;) 루피노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DOCG 2004. 이름으로도 기가 죽을 지경이다.

열어서 잔에 따르고는 강한 신맛을 느꼈다. 산지오베제가 원래 그렇지 뭐, 100%라는데...라고 넘기려고 했지만, 병을 열어둔지 1시간이 지나도록 신맛이 순해지질 않는다. 아니, 더 튄다. 2004년산이라고 참아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서 좀 거칠게 잔을 흔들어도 보고, 기다려도 봤다. 향과 입안에서의 느낌은 괜찮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맛이 튀느냔 말이다. 오히려 처음 코르크를 열고 30분 정도까지의 신 맛이 조화롭다고 느껴질 정도다. 좀 오래 열어뒀다고 해서 산화를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보니까, 이 와인의 수입원인 금양인터내셔널이 엄청나게 루피노 와인을 밀고 있는 모양이다.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가가 4만원대라고 해서 루피노의 키안티 클라시코 DOCG가 4만원 가치를 하진 못했으니까. 보관상태가 몹시 안 좋았던 것 같은 얼마전에 골랐던 트라피체 말벡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배에 담아서 대충 건너온다고 해도, 좀 더 신경을 쓰시지. 산지에서 농부나 양조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