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극장대기실2007. 6. 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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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 구성이 지나치게 친절할 때부터 좀 이상했다. 숨바꼭질하는 아들을 찾던 흔들리는 카메라나 범행이 일어나기도 전에 범인을 알려주는 상황들은 이 영화가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다.

<밀양>은 신애의 영화이지만 늘 카메라 포커스 한 발짝 옆에 서 있는 종찬의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어째서일까. 우리는 처음에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이해하려 노력했다. 남편을 잃고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동네에 내려와서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고단함에 공감하려 했다.

그러나 나도 교회에서 아픈 자매님의 손을 잡아주고, 절규하는 울음이 안타까워 머리에 손을 얹어주던 지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다. 누가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강가에 버려진 아들의 시신을 앞에서 충격에 다리를 휘청거리고 남편과 자식을 죽인 며느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당신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신애는 유난히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혼자 서 있는 장면이 많다. 유일하게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이 사라지고 그녀는 누구의 손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가녀린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위태위태하게 서서 어떻게든 혼자 이겨보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절망의 끝에서 그녀가 손을 내민 곳은 신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고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활짝 웃으며 ‘저 이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싱크대에 서서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목이 메인다. 신은 자신이 한 것처럼 죄인을 용서하라 하셨지만 왜 남편과 아들을 처참하게 데려가셨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

대신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서있는 종찬이 서 있는다. 신애가 죽던 원작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에 나타나는 그의 존재는 기대가 막연한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신애가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손 뻗을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결정적 순간에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을 제외하면 밀양에 들어설 때부터 내내 신애를 돕는 사람이다.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 앞에 거울을 들고 서 있던 그 남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살아줘서 고맙다고.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바라지 않던 그녀가 살려달라고 말하고, 거울을 들어주겠다며 다가오는 종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는 그녀가 변했다고 믿었다. 어설픈 희망을 품지 말라고 영화 내내 누누이 보았건만 먹먹한 마음에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는다면 나조차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