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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테니스 레슨을 받고 나오면, 몹시 배가 고프다. 아침부터 땀을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기분을 이용해 평소보다 더 과식을 할까봐 오히려 아침은 살살 먹게 된다. 그러다보니 점심 식사 시간은 무척 기다려지게 마련이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팠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나의 점심 시간을.

그런데, 매너없는 상대방이 점심 약속을 해놓고서는 약속시간 5분 전에 전화를 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못 나가겠는데요, 대신 저희 팀에 다른 사람을 보낼게요."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약속을 여러번 변경해가면서 이날 점심 약속을 잡았던 거냐? 월요일에도 당신이 개인 사정이 있다면서 약속 미루지 않았던가? 만나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미리 약속을 취소하든지. 다시 전화만 했단 봐라. 내 점심은 그래서 결국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 에스프레소와 오뜨 한조각으로 축소됐다. 고등어 조림을 먹을까, 김치찌개를 먹을까 고민하던 아침의 나는 오간데 없고. 젠장, 젠장, 젠장.

사진 속 몹시도 배고파 라켓까지 씹어먹을 듯 보이는 저 헝그리 테니스 선수는 고란 이바니세비치(Goran Ivanišević). 이바니세비치는 2001년 윔블던에 30살의 나이로 출전한다. 한 때는 193cm의 장신에서 나오는 200km가 넘는 강서브로 세계랭킹 2위까지 올랐던 무시무시한 선수였지만, 이미 이 때는 옛날 얘기가 됐을 때다. 노장, 퇴물 소리를 들으며 125위의 랭킹으로 와일드카드 자격을 받아 윔블던에 간신히 입장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가 코트에 서고 나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결승까지 승승장구하며 올라간 이바니세비치는 호주의 패트릭 라프터를 세트스코어 3대2의 접전 끝에 꺾고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다. 그랜드슬램에 올라설 때마다 그의 앞에는 늘 애거시나 샘프라스가 있었고, 그는 13년 동안 번번히 지기만 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첫 우승, 와일드카드 선수의 첫 우승 등 각종 신기록을 세우며 결국 노장 투혼을 불사르고 만다. 그런 그도, 아마, 배가 고프면 투혼이고 뭐고 없었을 테다. 라켓 씹어먹는 것 좀 봐라. 젠장. 점심약속을 취소하려면 좀 매너있게 1시간 전에는 취소하시라고!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