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2007. 7. 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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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놀림은 어색했고, 식탁은 지저분했다. 하지만 손님들은 군말 없이 긴 줄을 섰다.
  중년을 한참 넘긴 나이의 여성들이 교대로 식탁을 닦으며, 분주히 국수를 그릇에 말아 담아냈다. 하지만 밀려드는 손님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서 오후 2시로 잡은 실습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의 안양역 앞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줄은 식사시간 만큼이나 길었다. 오후 4시까지의 실습 시간 동안 이들이 판매한 국수는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1000원이니 20만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셈이다.
  이제 일이 손에 익숙해지면 두 명 내지는 혼자서도 한 시간에 100그릇 이상을 팔 수 있다고 했다. 문정자 씨는 꿈에 부풀었다. 가게를 정리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보통 크기의 밥숟가락에 반 수저가 안 되게 담은 커피. 설탕은 커피와 같은 양을 넣었고, 크림은 넣지 않았다. 그녀의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였다.
  2주 전, 문 씨는 경기 송탄시의 한 골방집에서 이렇게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를 타고 있었다. 천주교 수원교구청이 만든 자원봉사단체 ‘한마음’의 사업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사업설명회라야 동네 기지촌 여성들 몇 명을 모아두고 새 봉사활동을 설명하는 활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온 얘기는 솔깃했다. 한마음에서 돈을 엄청나게 싸게 빌려주고 가게 창업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한마음이 내건 사업 아이템은 ‘국수’.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좋은 길목에 국수집을 내고 1000원짜리 국수를 파는 일이다.
  가게를 내는 데 필요한 돈은 약 3000만 원. 이 돈을 기지촌의 여성들에게 연 1%의 이율로 10년 동안 빌려주기로 했다. 장사가 실패하지 않도록 창업컨설팅 회사에서 가게 터를 알아봐주고 국수 만드는 법까지 가르쳐 주는 조건이었다. 거짓말 같았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국수가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맘에 들었다. 고작해야 국물을 미리 내놓은 뒤 면만 덜어 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탁탁 데쳐서 그릇에 부어주고 고명을 올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본금을 대준다지 않는가.
  보아하니 함께 앉아 있던 여자들이 전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경쟁에서 뒤져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서로가 “그거 내가 할게”라고 앞다퉈 손을 들었다.
  모두가 쉽게 돈을 벌고, 쉽게 돈을 쓰던 신세들이었다. 젊었을 땐 그랬다. 이렇게 벌기 힘든 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쓰지도 않는 거였는데.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의 그네들에겐 일자리조차 없었다. 오직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줄 이유가 없었다. 한마음에서는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검은 사제복 차림의 신부가 왕 언니네 집에 들어섰다. 그는 면접관이었다.
  그날 참가한 여성들은 모두 5명. 신부는 이 가운데 3명을 먼저 뽑아 공동 명의의 가게를 내 주겠다고 했다. 1명에게만 돈을 빌려주면 가게를 정리해 도망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부는 이런 사업을 ‘마이크로 크레디트’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에게 낮은 이자로 소액을 대출해주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란 것이다.
  현재 전국 규모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벌이는 곳은 사회연대은행과 신나는조합, 아름다운재단의 아름다운기금 등 3곳.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 단위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도 생겨나고 있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돈을 직접 지원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재활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의 ‘사회복지은행’과 강원도 원주밥상공동체의 ‘신나는 은행’, 대구·경북 지역의 ‘작은 은행’ 등이 대표적인 지역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이다. 한마음의 마이크로 크레디트도 이런 곳들처럼 경기 남부 지역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으로 시작됐다.
  면접을 마친 문 씨는 다른 지원자들을 떠봤다. 자신의 ‘합격 가능성’을 예상해본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포기할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강 씨는 “딸이 혼혈인데 사춘기를 무사하게 넘겨줬어요. 그것만도 기특하고 고마운데 올해에는 4년제 대학에 입학까지 했어요.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지만, 어미가 적어도 용돈이라도 벌어줘야죠. 저, 아침엔 신문 돌리고, 주말에는 일당 2만 원 받고 전단지 돌려요. 이젠 일만 있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에요”라며 도무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콩팥을 떼어내는 수술까지 했다는 장 씨는 척 보기에도 약해 보였다. 과연 국수 마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문 씨가 되려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말했다. “평생 모았던 돈, 3년 전에 왼쪽 콩팥 떼어내느라 다 날렸어. 우리가 원래 보험이란 걸 모르고 살았잖아. 그러다보니 병원 갔더니 수술비가 수백만 원이 넘게 나오데. 이렇겐 살 수가 없겠더라고. 힘은 좀 들어도 국수 정도는 말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하루에 꼬박 4만 원 버는 호떡 포장마차를 끄는데, 손해만 보고 있어.”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5년을 살아왔던 집을 땅 주인에게 빼앗기게 생겼다는 이 씨,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늙은 에미가 돈이 없어 늙고나니 자식 찾는다' 소리를 듣기 싫어 꼭 일을 해야 한다는 최 씨. 포기해도 되는 이유라는 건 누구에게도 없었다. 문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나이 들어 미군들이 싫어한다며 평생을 일해왔던 '홀'에서조차 쫓겨났다. 한 때는 그 홀에서 웃음과 술을 파는 자신은 공주였는데도.
  결국 이들은 국수를 만들고, 직접 팔아보는 실습에 들어갔다. 첫 가게가 3개월을 버티면, 2호점도 3호점도 낼 예정이다.
  지난주 토요일은 첫 실습을 하는 날이었다. 한국인은 축하할 일이 있는 날이면 국수를 먹곤 한다. 그래서 이들이 창업할 가게의 이름은 ‘국수 먹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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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석 달 전에 써놓은 글. 이제야 올리게 된다. 뭘 망설였던 걸까. 그새 연합뉴스에는 이들의 성공스토리가 보도됐다. 시작 당시와는 많은 게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단지 바빴다는 이유로, 관심을 갖기 쉽지 않았다. 늘 바쁘게 마련인데, 가끔,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과연 무엇일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다. 넌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냐고.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