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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에이스. 그 말을 할 때면 혀끝에 울림이 느껴진다. 입 밖에 소리내어 발음하고 싶지만 정작 그 여섯 글자를 발음할 수 있는 자격을 따기란 네 번 중에 한 번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다. 네 번 중에 한 번이라니, 쳇,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열에 하나도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는 거다. 말하자면.

그래서 서브에서 중요한 건 에이스가 아니다. 오히려 포인트는 에이스를 노린 퍼스트 서브가 폴트 됐을 때 시도하는 세컨 서브다. 세컨 서브는 상대방의 리턴을 다시 공격 찬스로 노리기 위한 '바둑의 첫 수'다. 서브를 두고 있을 때, 나는 흑돌을 든 기사의 심정처럼 비장하다.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맞서 첫 수로 승부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기사의 비장함.

하지만,
역시,
에이스가 들어갔을 때가 가장 기쁘다.

그동안 나는 서브를 잊었다. 에이스를 넣었던 순간을 잊었고, 세컨을 성공시키는 노련함도 잊었다. 처음 서브를 배웠던 중학교 1학년 까까머리 시절의 그 서브를 나는 잊었다.

그 후 다시는 서브를 넣지 못했다. 몇 년 뒤 코트를 찾으면 다시 포핸드 스트로크-백핸드 스트로크-포핸드 발리의 정해진 순서를 답습하곤 했다. 누구도 '시합을 위한 테니스'를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박제된 곰 머리마냥 미련하게 포핸드 스트로크를 반복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서브를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클레이코트에서였다. 낙엽이 바닥에 톡, 소리를 내며 떨어졌을 때, 갑자기 공을 왼 팔이 뻗어가는 왼 발 앞 머리 위로 높이 던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올라갔다 떨어지려는 공을 톡, 하고 때렸다. 공은 제 자리에 꽂혔다. 아주 약하게. 에이스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내게는 에이스의 기쁨 못지 않은 '서브의 귀환'에 따른 기쁨의 엔돌핀이 샘솟았다.

몸에 힘을 뺐다. 갑자기 찾아온 16년 전의 기억에 허리와 어깨와 팔과 라켓 헤드를 내맡겼다. 이날 시합에서 나는 몇 차례 발리를 노리고 네트로 다가온 상대방의 머리 위로 높이 뜨는 로브를 성공시켰고, 스트로크 랠리에서는 상대방을 뒤로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의 멋진 톱 스핀 드라이브도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16년 전의 서브가 되돌아온 뒤 상대방에게 퍼스트 서브를 실패한 직후에 찾아왔다. 에이스를 노렸는데 공은 무심히 서브 라인 뒤편으로 떨어졌고, 상대방은 내 세컨 서브를 톡, 하는 서브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 때 나는 모험을 걸었고, 세컨 서브에 힘을 실었으며 에이스를 잡을 수 있었다.

늘, 모험과 도전에 따른 보상이 가장 달콤하다. 다시는 빌빌거리는 서브를 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이날의 게임 스코어는 6-3, 6-0. 불행히도 참패.

Posted by 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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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을 끝까지 본다는 것'은 그릇된 미신과도 같은 논리다. 테니스 선수의 서비스 스피드는 평균 150km. 랭킹에 들어가는 남자 선수들의 서비스는 200km가 넘는다. 앤디 로딕같은 경우에는 230km 이상도 자주 때려대는 걸로 아는데, 그걸 끝까지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의 실력이 엄청나게 대단하다는 뜻이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쳐대는 공의 스피드도 엄청나다. 100km 정도는 훌쩍 넘기게 마련인데 그걸 끝까지 본다는 것도 나같은 범인의 기준에서야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앞에서 날아오는 공이야 볼 수 있다고 쳐도 '끝까지'라고 말할 때 '끝'은 라켓면에 공이 부딪히는 임팩트의 순간인데 그 순간은 공이 몸의 옆에 위치한다. 내 옆구리 방향으로 시속 100km가 넘게 빠져나가는 공을 끝까지 볼 수 있으려면 지금 정도의 훈련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을 끝까지 본다고 말하는 건 대부분 실제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공을 끝까지 봤다는 환상'을 갖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환상이 중요하다. 공을 끝까지 본다는 환상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며 공을 끝까지 보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은 결국 게임에서 지고 만다.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성실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직장', '착한 사람은 언젠가 인정을 받게 마련'이라는 환상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며 대충 실용적으로 살다 보면 결국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그 환상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게 비록 환상일지라도.

Posted by 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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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에서의 스플릿 스텝은 공이 상대방의 라켓에 임팩트 되기 직전에 뛰어올라 임팩트와 함께 착지하면서 동시에 공이 오는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동작, 또는 그 기술을 가리킨다. 일종의 '준비동작'인 셈이다.

스플릿 스텝의 타이밍을 잘 잡으면 경기에서 '반 걸음'을 벌 수 있다고 한다. 단식 경기를 기준으로 테니스에서 좌우를 포괄할 수 있는 넓이는 4, 5걸음 이내. 반걸음을 앞서면 말 그대로 코트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난 연습 때 스플릿 스텝을 꽤 염두에 두는 편이다. 시합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짝 뒷꿈치를 떼 주는 것 정도만으로도 괜찮은 이 간단한 동작은 실제 상황에서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수없이 미뤄지고 실패하게 된다. 특히 좋은 공으로 공격 당할 때엔 당황해서 더더욱 스플릿 스텝을 건너 뛰게 마련.

반 걸음 앞서 나가기 위해 살짝 뒷꿈치를 들어주며 뛰는 단순한 동작은 "공을 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고 "성공하고 말겠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하지만, 용기가 없거나, 무성의하거나,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며 끌려 가는 사람은 스플릿 스텝을 밟기란 쉽지 않다. 공을 끝까지 봐야 하는 것이 좋은 스윙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면, 뒷꿈치를 들고 약하게 뛰어주는 스플릿 스텝은 코트를 컨트롤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래서 스플릿 스텝은 상대방과 나에 대한 일종의 예의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고, 이 한 샷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표현.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반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