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2007. 2. 21. 22:28

순식간에 승부가 갈리곤 하는 승부차기.

승부차기의 성공률은 80%가 넘는다. 하지만 의외로 승부차기의 매력은 20%도 안 되는 실패율에 있다.

골키퍼는 "못막아도 그만"이지만 키커는 "못 넣으면 역적"이 되기 때문. 이 실수의 공포가 선수들로 하여금 '가운데 공'을 극단적으로 피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실수 확률을 높인다. 보는 사람의 두근거림도 여기서 생긴다.

선수들은 왜 공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만 찰까? 가운데로 차는 선수는 거의 없다. 가운데 낮은 볼은 하물며 더욱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쪽팔림의 두려움' 탓.

2006년 월드컵의 가장 재미있는 기록 가운데 하나는 스위스의 '승부차기 0점' 기록이다. 80~90%에 이르는 승부차기 성공률을 감안할 때 이건 아마도 1000분의 1 확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들을 쫄게 만든 승부차기의 비밀은 당시 경기를 보도한 AP통신 기사에 잘 나와 있다.

AP통신은 스위스의 첫 키커가 공을 차자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스트렐러의 노력은 첫 공을 찬 우크라이나 선수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공이 쇼브코프스키 골키퍼에게 가운데로 낮게 날아가버린 것이다." 우크라이나 첫 키커 셰브첸코도 골을 놓쳤지만, '적어도 가운데로 낮게 차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트렐러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로 묘사됐다.

스위스의 둘째 공도 마찬가지로 실축. 하지만 묘사는 사뭇 달랐다. "바르네타가 크로스바를 맞췄다." 그게 전부였다. 크로스바를 맞췄을 뿐이다. 어차피 실축은 같은 실축인데.

세번째 스위스 키커 리카르도 카바나스. AP는 흥분한다. "리카르도 카바나스의 슛은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그가 찬 볼은 골대 한 가운데를 향해 날아갔고, 우크라이나 골키퍼의 앞에 그대로 볼을 헌납했다." 이것도 결국 같은 하나의 실축일 뿐이었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을 월드컵 경기, 누구는 그저 크로스바를 맞췄을 뿐이지만, 가운데로 공을 날린 그들은 상대편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거나,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인데도 키커로 나선 셈이 된다. 이런 와중에 어떤 강심장이 가운데로 공을 찰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 월드컵을 보다보면 축구라는 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스포츠였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름답기보다 씁쓸하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2. 2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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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흔하디 흔한 질문 가운데 하나가, "당신은 지금까지 다녀본 장소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십니까?"라는 질문이다.

내게는 두 가지 대답이 있다. 외국에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서울이라고 말한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는 바다처럼 넓은 강이 흐르고, 그 강의 북쪽 지역 한 가운데에는 서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라고. 그리고, 500년 왕조의 궁궐이 수도 한 복판에서 일본 식민지 시절의 유산, 미 군정의 전진기지 등과 한 데 어우러져 존재하는 몹시 복잡한 역사의 땅이라고. 여름이 오면 짐작도 쉽게 하지 못할 열기와 습기에 노점 음식점의 향기가 어우러져 도시 전체가 땀을 흘리는 곳이라고. 겨울이면 모든 게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곳에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만한 살바람에 맞서 단 돈 1달러도 되지 않는 가격에 뜨거운 오뎅 국물을 파는 곳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바르셀로나라고 대답한다. 그 곳은 여름에는 '따뜻한 가을'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겨울에는 '추운 봄'같은 날씨가 이어지는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사철 좋은 날씨가 펼쳐지는 도시라고. 골목 어귀마다 피카소와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술집과 까페를 만날 수 있는 예술의 향기가 피어나는 곳이라고. 유럽 최고의 부자들과 유럽 최고의 무정부주의자들이 한 데 모여 총부리를 휘두른 흔적들을 구경하려고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그러면서도 밤 늦게까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평화롭게 걸어다닐만큼 안전한 곳이라고. 한마디로, 사람들이 '멋진 도시'라고 부르는 객관적인 조건은 다 이 곳에 있다고.

나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서울일까, 바르셀로나일까. '객관적'으로 봐서 별 특징없는 도시지만 내가 그 매력을 알기 때문에 남들에게 침 튀기게 자랑하고 싶은 나만의 서울일까, 아니면 객관적으로 모두가 칭송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나도 그 도시의 사랑에 있어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만인의 바르셀로나일까.

과연, 무엇일까?

Posted by 흰솔
동상이몽2007. 2. 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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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롱을 위한 연가(A Love Song for Bobby Long)라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난 어딘가로 날아가던 중이었다. 아마도 2만피트 쯤 상공에서, 5인치 정도의 스크린으로 난 바비 롱을 만났다.

그곳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의 뉴올리언즈. 철부지 여대생은 바비 롱을 찾아가고, 주정뱅이 영문학자 바비 롱은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지독하게 춥거나, 끔찍하게 더운 곳. 때로는 호수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보드카에 취해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작은 시골마을.

대사로 말을 하는 영화가 있다. "나 너 사랑해.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날 버려. 난 정말 슬퍼." 주인공은 슬프다. 하지만 관객은 슬프지 않다. 이런 영화는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해져 버린 사진과 같다.

상황으로 말을 하는 영화가 있다. 남자 주인공은 떠나 버렸다. 여자 주인공은 조용히 핸드백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낸다. 그 곳엔 남자 주인공과 그동안 계속 함께 봤던 영화표가 수십장 모아져 있다. 한 장 씩, 한 장 씩 반으로 찢는다. 그리고 눈물은 보이지 않지만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다. 주인공도 슬프다. 관객도 슬프다. 적당한 조명에 훌륭한 테크닉, 이 사진은 훌륭하다.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데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이 쏙쏙 전달되는 영화가 있다. 이건 마술이다. 재미가 없는 것 같은데 재미가 있고, T.S.엘리엇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랑 고백처럼 들린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는 죽음이 찾아오고, 슬플 것 같은 장면은 영화에서 몽땅 들어냈는데도 보고나면 눈물이 쏟아진다. 주인공은 슬프지 않다. 하지만 관객은 몹시 슬프다. 이런 영화는 인생의 영화가 된다.

손에 펜이라는 것을 쥔 이후로, 펜은 데스크탑을 거쳐 노트북 컴퓨터로 바뀌었지만, 설명조의 내 글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 이름은 바비 롱. 과연 언젠간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이 될 수 있을까.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