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서재'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9.03.03 Original of the Species <스티브 잡스>
  2. 2007.07.10 마미야 형제 2
  3. 2007.06.03 그것
  4. 2007.04.17 캐비닛
  5. 2007.03.28 공중그네 2
  6. 2007.03.20 연금술사
  7. 2007.03.05 연애 소설 읽는 노인
  8. 2007.02.21 Aeschylus' Oresteian Trilogy
  9. 2007.02.21 빌러비드
  10. 2007.02.21 둠즈데이 북
Purslane/서재2009. 3. 3. 14:04

총서에 가끔 손이 갈 때는 어떤 주제에 대한 최초의 접근인 경우가 많다. 잘 모르는 분야지만 한번 시작하고 싶을 때, 가벼운 무게에 알찬 내용이 담겨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다.

가끔 가벼운 무게에 내용마저 가벼워서 실망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기대이상의 보석같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작은 책이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이런 총서류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행본으로 만들어도 좋을 만한 주제를 담고 있거나, 이름만으로도 신뢰가 가는 저자도 많다.

최근 살림지식총서에서 기업인들을 주제로 몇 권을 출간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잭 웰치,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등. 이미 시중에는 이들에 대한 책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그들의 성공신화와 그 비법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지금도 쓰여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사람들은 뭐가 다른 걸까? 심플한 디자인의 애플과 언제나 통통튀는 픽사를 떠올리며 <스티브 잡스>를 먼저 집어들었다. 청바지에 평범한 티셔츠. 마른 몸에 길쭉한 얼굴. 동네 아저씨같은 빌게이츠도 만만치 않지만 그도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영자라기엔 너무 심심해보인다.

그의 머릿속에 예쁜 맥과 아이팟이 들었던 걸까? 보는 내내 상상하면 실현되는 구나라고 감탄을 자아냈던 월·E가 들어 있나? 결론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다혈질이며, 엉뚱하지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성공하지만은 않았고, 그때마다 자신의 스타일로 해결해나간다. 질릴 정도로 안하무인이기도 하지만 결국 소비자 신뢰도 1위의 가장 존경받은 기업을 이끌어낸다.

여기에는 그를 견디며(몇몇에게 그는 견디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그와 함께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애플 = 스티브 잡스로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만한 사람들이다. 이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훨씬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함께 시작한 스티브 워즈니악, 픽사의 에드와 앨비, 지금의 애플이 있게 한 팀들. 이들의 이야기만 모아도 또 다른 재미있는 책을 한권 쓸 수 있을 것같다.

그는 이 책을 시작하는 U2의 노래 'Original of the Species'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종족의 첫 번째 인간.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는 인간. 역동적인 그의 삶을 읽다보니 이 책이 90여페이지의 총서라는게 아쉽다. 다행히도 책의 말미에 더 읽을 거리와 더 찾아볼 거리들을 친절히 정리되어 있다. 저자도 하고 싶은 얘기가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 부록 아닌 부록을 뒤적거리니 아쉬움이 조금 달래진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7. 10. 17: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가 개봉한 한참 후에 원작을 발견했다. 작고 예쁘게 양장되어 나오는 일본 소설에 몇 번 속은 터라 영화 포스터를 보지 않았더라면 집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상황들을 고려하고도 에쿠니 가오리 작품이라는데 호기심이 두 번 동했다. <냉정과 열정사이>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회자되는 데에는 노련함이 있을 것 같았다.

마미야 형제는 궁상맞고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소박하고 엉뚱한 구석은 있지만 아직 소년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연애는 더더욱 그렇다. 찌질해 보이는 남자들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유독 불편하다. 삼십대의 궁상맞은 언니들 이야기는(이제 ‘언니’들도 아니다ㅠㅠ) 재미있는데 남자들이 그러는 모습은 외면하고 싶어진다. 다행히 이 형제는 연애를 제외하고는 귀여운 편이다.

좋아하는 일본적 취향이라면 매체를 불문하고 역시 섬세함 아닐까. 손에 잡힐 듯한 일상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아주 명확하게 내 일상으로 이입된다. 장소와 상황에 대한 물리적인 묘사도 그렇지만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부분은 더 그렇다. 이를테면 아키노부가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서는 이런 부분 .

  가게에 들어서자 바로 알아차린 나오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키노부의 다리에서 힘을 빼고, 마음에 힘을 주는 미소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 온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소심한 아키노부의 짝사랑은 이상하게 안타깝지 않다. 두 형제의 평화로운 일상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오히려 이 흥미진진한 사건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할 뿐이다. 사랑에 빠지면 이루어 져야만 할 것 같은 주인공의 의무감 따위는 없다.
술이 잔뜩 취해 돌아온 아키노부는 문 밖에서 동생 테츠노부를 시끄럽게 불러댄다.

  “있는게 당연하잖아.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 줄 알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자기 방을 나온다. 복도가 싸늘하다. 거실 난방을 틀어 두면 좋았을걸. 테츠노부는 후회했다.
  출퇴근용 검정 코트 차림 그대로, 아키노부는 부엌에 서서 물을 마시고 있다.

짜증내면서도 형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든다니.  다행히 두 사람은 큰 원을 한바퀴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런 결말이 더 비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에 든다. 갇혀 있는 소설 속 공간이라면 그렇게 두 사람만 멈춰서 있어주면 좋겠다. 매일 출근을 하고 저녁엔 야구 스코어를 챙기며 비디오를 빌려보고, 한가하게 살랑대는 바람을 맞으며 거실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맥주를 한잔 하고 잠이 드는 것도. 고백하자마자 거절당하고 신칸센에 올라타 눈물을 훌쩍이는 모습은 어쩐지 어울리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책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6. 3. 17:2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읽고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논문발표회가 끝나고 머리를 식힐겸 집어들었다가 방대한 분량에 오래 지체되었다. 1800페이지가 넘는 3권짜리 책을 집어들 때는 휴식치곤 너무 긴 것 같아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it)>은 스티븐 킹의 최고의 역작이며 대중소설로서의 흥행과 문학적 성과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찬사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순전히 분량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사소설도 아닌 공포소설을 오랫동안 읽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상권을 읽으며 스티븐  킹은 역시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이 탁월한 작가임을 다시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상,중,하 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특히 6명의 친구들이 전화 한통을 받고 24년전 데리로 돌아가려는 도입부분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실체화 되지 않은 공포를 예민하게 그렸다. 각각의 캐릭터를 그려보게 되는 초반의 묘사는 담담하게 과거의 일을 궁금하게 만든다. 

<셀>에서 평화로운 공원이 폭풍의 전야 같았다면 <그것>의 인물 도입부는 전체의 1/3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전화 한통으로 홀린 듯 어린 시절을 보낸 데리(市)로 돌아가려는 6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진다.

스티븐 킹은 인간의 공포감을 잘 끌어내는 작가이다. 어린 시절에 본 <캐리>, <샤이닝>, <미저리>의 공포감은 강렬했다. 특히 도시의 공포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둡고 눅눅한 지하, 하수구, 쥐, 더러운 먼지들이 한데 뒤엉켜 도시 전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바로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타인이다. 도시의 익명성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위협적 존재이다. 데리 역시 스스로 살아숨쉬는 위협적 대상이며 존재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다.

초반이 무형의 공포에 대한 것이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그것’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 감에 따라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것’은 해리포터의 ‘보가트’처럼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에게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마지막에 최후의 결전에서 드러내는 그것의 모습은 유명한 조형물이 떠올라서 기대가 반감되었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말할 수 없지만)

이 책의 진짜 공포는 아무리 빨리 읽어도 절대 한 호흡에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침대 맡에서 읽다가 책을 내려 놓는 순간 악몽을 꾸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스티븐 킹은 최소한 데이트 약속을 깜박 잊게 만들고, 런던발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뉴욕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워하게 만드는 소설가로서의 목적은 달성했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4. 17. 09: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능청스러운 거짓말쟁이가 나타났다. 정교하게 속이지 않아서 좋다. 거짓말 인줄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주고 싶은 능청스러움.


책 <캐비닛> 날개에 날린 작가 소개에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고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그냥 평범해 보였다. 정규 교육을 받고 글쓰는 재능이 있어보여 몇 년 더 공부했나보다 싶었다. 물론 긴 글을 쓰는 지난한 과정은 생략되어 있겠지만.


그러나 <캐비닛>을 다 읽고 뒤에 붙은 심사평을 대충 넘긴 후 전경린씨와 함께한 수상작가 인터뷰를 보면서 나의 섣부른 판단을 반성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또 존재하는 구나 싶었다.


도시의 하층민 생활을 경험하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다가 25살에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려웠겠지만 글쓰는 ‘일’을 하는 2년간 매달 오십만원을 지원해주던 친구가 존재했고, 그러면서 산이나 집에 틀어박혀서 확신도 없이 몇 년씩 글을 쓰는 끔찍한 과정을 자진해서 시작하다니. 움직일 돈이 없어서 앉아서 글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은 대입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에브리데이가 할리데이였지만 암흑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욕심이 별로 없었다. 한달에 팔십 만원정도면 어슬렁거리며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대신 소설을 시작하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위가 헐고, 등짝이 아프고, 편두통과 눈이 아플 정도로 글을 쓰며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16km를 걷는다.

그는 말한다. 능청스러운 거짓말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있는’ 것을 ‘있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있게 만드는 최대의 적은 ‘작가’다. 그는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존재이다. 서술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캐비닛>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상피에르의 루저 실바리스처럼 유일한 생존자이며 서술자지만 그래서 진실을 검증할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다. 독자가 진짜 같지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능청스러운 거짓말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더 풍요로워진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나는 책을 덮고 반성했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3. 28. 18:4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상 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의 강박증은 『공중그네』처럼 주로 남성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별과 관계없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부풀려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초월한 의사 이라부만이 여유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소아과에서 아이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싸우는 의사라니. 그야말로 치료의 대상 아닌가. 강박증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진짜 환자의 속을 꿰뚫고 의도한 치료였다면 그는 천재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라부는 확실히 정신병이다. (정신병은 천재에게 많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많이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으며, 환자들에게 좋은 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도시에 사는 우리는 누구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밖으로는 거대해 보이고 싶어서 왜소한 모습을 감추려 한다. 하루에도 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쳐야하고 그 속에서 나라는 인간을 각인시키고, 다시 적당히 지우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공중그네』의 주인공들은 그럴듯한 직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강박증을 말할 수 없어서 조용히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상담을 통해 스스로가 그린 거대한 모습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공중그네』이야기는 광고문구처럼 유쾌했지만 이라부의 병원은 무서웠다. 어쩐지 상담이라도 받으러 가면 생글생글 웃으며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만 시키면서 괴롭힐 것 같다. 그는 치료를 받으러 온 어떤 캐릭터보다도 매력적인 의사지만 옆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어렵다. 소심한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그런 성격을 가지면 사는데 장애가 많아진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이라부에게 보장된 앞길이 없어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어쩐지 딴죽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커다란 몸집으로 어떻게하든 될대로 되겠지 하는 표정으로 공중그네를 타고, 캐치볼을 하고, 엉망진창인 글을 쓰는 그 모습에 다들 반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에서 무얼 본걸까. 궁금했다. 강박증에 걸린 환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정도는 다르지만 자신의 자화상으로, 의사 이라부는 이상형으로 보기라도 한 걸까. 글래머 간호사의 비타민 주사 한 대만 맞으면 나도 마음이 편해질 거라는 상상을 하며.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3. 20. 11:37

  연금술사는 나르키소스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매일 호숫가를 찾았다는 나르키소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결국 호수에 빠져 죽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수선화(나르키소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스카와일드의 이야기는 결말이 달랐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왔고,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오레이아스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숲의 요정들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게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금술사는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도 소리내어 감탄했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렇게 서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보았더라면 슬프게 애도할 일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이 인상적인 시작의 세페이지만으로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3. 5. 14:06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이스 세풀베다 정창 역 열린책들 2006.02.25

노인이 책을 읽는 방법은 독특하다. 문장을, 단어를, 음절을 천천히 음미한다.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는다.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다. 치과의사가 6개월마다 전해주는 두 권이면 족하다. 그는 느리지만 섬세하다. 카누에 떠내려 온 금발의 시체를 보는 눈은 탐정 같으며, 목숨을 걸고 살쾡이와 마주 설 때는 호흡마저도 조심스럽다.

그래서 슬프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연애 소설만을 고집하는 노인의 취향은 어쩐지 이상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밀림으로 떠나온 지 2년 만에 죽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 그의 애도는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간 밀림을 향해 분노하지만 이내 밀림은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정없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양키들의 폭력성에 저항해도 결국 읍장을 도와 살쾡이를 잡으러 밀림으로 들어간다.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타협. 노인은  공존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는 것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밀림은 사랑하는 이를 앗아가기도 했으나 평생을 두고 적응해야 할 대상이며, 가족처럼 지냈던 수아르 족 인디오들 역시 그를 친구로 대했을 뿐이다. 노인은 양키에게 죽은 수아르 족 친구의 복수를 했으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게 했다는 이유로 부족을 떠나게 된다. 인디오들은 떠나가는 그가 멀어지자 발자국을 지운다. 어쩌면 딱 그만큼의 거리가 가장 행복한 삶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2. 21. 23: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 천병희 역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10.01

그리스 비극 Aischylos

아이스퀼로스Aischylos는 그리스의 유명한 비극작가이다. 그는 BC525-426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의 아들로 출생하여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했었고, 애국심이 대단하여 자신의 운명과 아테네라는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였다. 디오니소스 연극 축전 비극 경연 대회에서 40세에 첫 우승을 하였으며, 중간에 한번 소포클레스에게 우승을 뺏긴 적이 있을 뿐 평생에 걸쳐 14번의 수상을 하였다. 그 중 오레스테스 3부작은 마지막 작품이며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비극작품은 3~4편이 한 작품이되므로 52편으로 상을 받고 총 70여편을 썼으나, 제목만 남아있고『페르시아인들』(472),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영웅』(467), 『오레스타에아 3부작』(458), 『탄원자들』,『결박된 프로메테우스』7편만이 전해진다.

기원전 5세기에 비극은 유독 아테네에서만 100여년간 융성했다. 이는 기원전 5~6C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종교로 받아들여졌던 신화체계에 합리주의가 더해지면서 비극이 창조되었다.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무너지고, 당대 소피스트에게 신화는 거의 무신론에 이를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신화는 정치가들이 백성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에 불구하며 신화는 허구라고 믿었다. 이러한 극단적 상대주의와 나름의 합리주의로 인해 신들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비극 작가들은 이런 생각으로 폴리스의 이념이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합의를 찾으려는 노력을 비극을 통해서 이루었다. 그러므로 비극에는 갈등의 화합과 타협이 주요한 주제가 된다.

질서의 회복

오레스테스 3부작은 플롯이 단순하다. 아가멤논의 죽음, 오레스테스의 복수, 복수 이후의 오레스테스로 이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신의 정의와 신의 질서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드러난다. 아버지를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오레스테스의 갈등은 흔히 햄릿의 그것과 비교된다. 「아가멤논Agamemnon」이 시작하면서 파수병의 대사 역시 햄릿의 도입부와 비슷하다. 그러나 햄릿이 복수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을 하는 것에 비해 오레스테스는 복수가 정당한지, 어머니를 죽여도 되는지에 대한 논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가멤논이 죽은 것 자체가 최고 질서에 파괴를 의미하므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은 비록 어머니의 죽음이라하 더라도 정당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행동 역시 복수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일방적인 비판을 할 수는 없다. 트로이 전쟁을 위해 배를 띄웠으나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움직이지 않자 아가멤논은 막내딸 이피게네이아를 재물로 바친다. 그녀는 10년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라를 지켜낸 여왕으로서의 풍모와 지혜를 가졌으나 한편으로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한없이 길어진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으며, 고통을 받기는 전쟁터에 있는 백성이나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을 대신해서 통치를 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그만한 품위가 갖춰져 있었음을 알 수있다. 「아가멤논」초반의 코러스장과의 대화를 보면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정세에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아가멤논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복수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므로 그녀는 왕비의 품위와 함께 복수하는 비장함도 가져야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이 가지는 가장 큰 요인은 오만함이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일때 코러스 장의 말을 무시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지키고자 한 질서는 모계적 질서로 대변된다. 딸의 죽음에 복수를 하므로서 혈연적인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로 상징되는 질서는 자연의 질서, 피의 질서이다. 그러나 비극에서 좀더 중시되는 것은 부계적 질서이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아가멤논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질서의 회복에 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도시국가의 일원으로서 질서의 상징인 부왕의 복수에 대한 승인은 정치적, 애국적인 주제이다. 어떻게 폴리스의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대의 명분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이러한 두 세계는 협소한 자아와 우주적 질서의 충돌로 연장된다. 비극의 세계관에는 낙관주의가 있는데, 이는 고통을 통해 인간이 올라 설수 있으며,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질서의 회복을 중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주의적 세계관이 성행하던 중세에는 비극이 거의 없었다. 지상에 아무리 끔찍한 일이 있더라도 그 위에 신이 있으므로 죽음의 삶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이 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지상에서의 카타르시스를 둔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비극이 성행할 수 없었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오히려 다시 비극이 부활하게 된다. 고대 비극이 마련된 비극이며 운명적 상황이었다면, Shakespeare의 비극에 드러나듯이 이 시기의 비극적 상황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개성, 고유의 본성 때문에 일어난다. 

새로운 질서와의 조화

오레스테스 3부작을 마무리하는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제우스로 대변되는 새로운 질서의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복수의 세 여신들이 어떻게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하는가가 3부의 중심이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이 맞선다. 여기에 아테네가 판관 구실을 하게된다. 부계사회위주의 올림수프에서도 젊은 신을 옹호하는 것이 아폴론이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도 결국 아가멤논을 죽인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인 복수로 인정한다. 반면 복수의 여신들은 어머니(Gaia, 대지의 신)가 모든 것을 대변하던 구세계의 신이다. 그들은 제우스의 부계질서 이전의 신이므로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복수의 여신들의 판단이 있기 이전에 이미 아폴론은 오레스테스의 행동이 폴리스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죄를 사했다고 말한다.

 일련의 재판과정은 아무리 아폴론이 내린 명령이라 하더라도 복수의 여신들에게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토론의 방법을 통해 설득하는 과정이다. 아테네나 아폴론은 젊은 신이고 복수의 여신들은 늙은 노인들이다. 그들은 새 세대의 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에 노하고 있다. 아테네 역시 여신이기는 하나 어머니가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으므로 결혼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아버지를 대변하는 신이다. 결국 투표로 가부동수가 되었으므로 아테네가 무죄를 선언하나 Eumenides는 인정하지 않는다. 폴리스는 국가의 위엄이 최후의 보루이다. 오레스테스가 결국 무죄가 되는 것은 결국 힘의 논리로 밀린 결정으로 볼 수 있다. 무승부인데 무죄를 선언한 아테네가 생각을 못박았기 때문일 뿐 사실상 한계가 있는 딜레마이다. 오레스테스의 입장에서는 아테네의 은총일 뿐이다.

결국 아테네가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설득을 하므로서 복수의 여신들은 자비의 여신이 된다. 그들은 제우스의 통제하에 위치는 인정하되 지하로 내보내진다. 아테네는 그들을 적당히 달래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신 중심의 가치관은 아테네에 정착한 민주주의와 소피스트의 합리주의·과학적 사고방식이 시화와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도기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가 신화로 한발 물러나는 단계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제우스의 질서를 옹호하며, 우리의 당면과제는 그것과의 조화에 있다고 여긴다. 권력의 변화에 과거와 현재의 세대가 필요하며, 여신들의 요구도 어느정도 충족시켜주므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비극이라는 공연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연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스킬로스는 수만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관용과 용서의 감정을 유발함과 동시에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이스퀼로스


Aeschylus' Oresteian Trilogy를 읽을 수 있는 곳


[Agamemnon]  http://classics.mit.edu/Aeschylus/agamemnon.html
[Choephori]  http://classics.mit.edu/Aeschylus/choephori.html
[Eumenidides]  http://classics.mit.edu/Aeschylus/eumendides.html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2. 21. 23:20

사용자 삽입 이미지

Toni Morrison/ 김선형 올김/ 들녘/ 2003

「빌러비드beloved」는 1851년 신시네티Cincinati에서 있었던 마가렛 가너Margaret Garner라는 흑인노예여성이 자기 자식을 죽인 조그만 사건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이 사건에서 흑인 내부의 문제, 노예문제, 그리고 여성의 문제를 보았다. 어린 딸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선택에 우리는 함부로 비판을 가할 수 없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물론 할말은 없지만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다.

흑인은 미국내 소수민족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노예 역사는 길지 않지만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 문학에 있어서도 흑인 문학의 비중은 크지 않다. 반면 솔 벨로우Saul Bellow등 유태계 문학은 20세기 미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태인들만이 가진 방랑자의 역사, 소수민족의 특수성, 홀로코스트의 경험 등이 문학작품에 등장하면서 주목을 받아왔다. 최근 유태인들이 미국사회의 핵심에 많이 편입하면서 유태문학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주류가 되면서 강자의 위치로 서서히 변해가게 되었다. 흑인의 경우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쉽게 떠오르는 엉클 톰의 이야기도 백인이 다룬 흑인문제이지 흑인 자신의 경험은 아니다.

미국 내에서의 흑인들은 특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온 개척자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바다를 건너왔다. 미국 도착해서도 혹독한 노동을 하고 하나의 잔인하게 다뤄지면서 독특한 감수성을 형성했다. 해방이 된 후 여전히 인종차별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 와서야 제도적 장치로 흑인의 사회, 교육 환경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최근 대학에서는 흑인쿼터제를 사용하기도 해서 백인들이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흑인들의 역사가 소설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은 백인의 소설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표현된다.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미국인(American Citizen)으로서의 정체성 찾기에 주력한다. 흑인문학은 1960~70년대 미국 내에서의 흑백 갈등, 흑인의 인권, 법적차별에 관심을 가지다가 최근 많이 해결되면서 흑인 내부의 문제, 자기치료, 수많은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많은 인종이 하나로 융화되는 melting pot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melting salad라고 말하기도 한다.

「빌러비드」는 노예해방령이 선포되기 전인 1856년에서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남부재건이 끝날 무렵인 1874년 사이를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쎄서Sethe는 처참한 고통을 경험하고 임신한 상태로 모유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두 아들, 딸과 함께 임신한 몸으로 탈주에 성공하지만 노예주인 선생(school teacher)에게 발각되자 이제 막 걸음을 뗀 딸을 죽인다. 소설은 이 사건이 일어난 17년 후에서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그 이후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쎄서는 다른 흑인들과 교류도 없어졌다. 귀신들린 집으로 불리는 그 집은 계속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두 아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난다. 탈출할 때 뱃속에 있던 덴버만이 엄마와 함께 고립된 집에서 살아간다. 쎄서는 자기의 손으로 목숨을 빼앗은 아기의 영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7년 만에 사람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여자아이가 집에 찾아오고, 쎄서는 그 아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치유한다.

실제 사건이 일어날 당시 마가렛 가너에게는 남편과 여러 흑인이 같이 있었으나, 소설에는 남성의 존재가 아예 사라진다. 함께 하기로 했던 남편은 결국 탈출에 실패하고, 쎄서를 감싸주던 폴 디Paul D 역시 사건을 알게 된 후 쎄서를 떠난다. 자상한 남편의 역할을 할 것 같던 그도 사건을 감당하지 못한다. 대신 빌러비드를 만난 후 조금씩 마음을 여는 쎄서에게는 마을의 흑인 여성들의 손길이 닿는다. 모리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아니라 흑인의 연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쎄서는 농장에서 유모역할을 했지만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인자한 모습이 아니다. 근대 서구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은 여성은 가정의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도 정치나 기업 경영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슨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가정을 지키는 여성의 역할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강조하고 있다. 쎄서의 시어머니인 베이비 석스는 동네사람들에게 뭘 해서 먹이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렬한 연설을 하고 집회를 주관하는 한편 전통적 여성의 역할이라 여겨진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모리슨은 남녀 성 역할을 전통적 역할에 매어두지 않으면서 여성의 전통적 모성 역할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쎄서나 베이비 석스는 가정 내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강하고 적극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빌러비드 역시 유령인지 진짜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흑인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그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노예제와 연관된 역사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집단적 무의식이다. 빌러비드를 죽인 쎄서가 죄의식의 화신이라면 빌러비드는 욕망과 불만족을 가지고 있다. 쎄서가 빌러비드를 통해 잊고 싶고, 억누르고 있던 죄의식을 일깨우고 속죄하는 것을 그래서 이다. 쎄서는 그녀를 통해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야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기법에서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사용하므로서 쎄서의 기억의 파편들의 조각을 드러낸다. 모리슨이 re-member라고 부른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한편 복원하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경험을 기억하되 그것을 직시하고 개개인의 삶에서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잊지 말 것을 강조한다. 흑인의 종족적, 개인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주체로서 작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2. 21. 23:1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코니 윌리스 / 최용준 역 / 열린책들 / 2005


도서관에 가면 아무래도 전공서적 근처를 가장 많이 가게 된다. 지금은 전공 자체가 워낙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서 인문학, 어문학, 사회학, 예체능계열 서적을 다 찾아다니고 있지만 학부땐 수업관련 서적은 영문학관련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 구석에 처박혀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책 번호 따위를 찾을 필요도 없게 될만큼 작가별, 분야별 위치가 머릿속에 그려지게 될무렵, 수업시간에 체크해두었던 소설을 한권씩 골라 읽으면서 열람실에서 여유를 부리는게 젤 행복했다.

현대 미국 소설과 영국 소설은 앞뒤칸으로 꽂혀있었는데, 중간쯤 슬쩍 꽂힌 현대 소설들이 있었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들이며(몇십년 후엔 모르겠지만) 폴 오스터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이다. 물론 핑크빛 꽃무늬로 장식된 미국 로맨스 소설이나 SF, 스티븐킹의 소설등도 있었다.

가끔은 교과서에 없는 소설을 읽고 싶을 때가 있지만, 수첩에 읽어야할 책 목록을 적어두었다가, 하나씩 지우는게 취미아닌 취미여서 도서관에서 충동구매(?)는 쉽지 않다. 4권쯤 뽑았다가도 (알바하는 사서들에겐 미안하지만) 3권은 다시 내려놓고 오게되는 것이다. 그 책 중에 하나가 코니 윌리스의『개는 말할 것도 없고To Say Nothing of the Dog(Bantam, 1998) 』였다.  녹색 양장을 하고 생뚱맞게 꽂혀있는 이 두툼한 개에게 눈이 가면, 이 정도 제목은 읽어줘야 할 것같은 마음에 만지작 거리다가도 다소 묵직한 모양새에 내려놓기를 여러번했다.

그러다 이번에 큰 맘먹고 도서관에 갔는데, 3편의 연작중 세번째인 '개'는 어디로 놀러가고, 두번째 장편 『둠즈데이 북』이 꽂혀있었다. 번역은 나중에 됐지만 앞서 쓴 책이라니 먼저 읽어도 좋을 듯싶어 일단 데리고 나왔다. K군의 표현을 빌자면 '그 사전같은 책은 뭐니?'였지만 지난 일주일간 2개의 사랑니를 뽑는 고통을 잊게해준 친구였다. 코니아주머니의 유머감각은 단연 최고!

중세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키브린은 홀로 중세로 떠난다. 치밀한 계획을 하고 떠났지만 기술자들의 계산 착오로 1320년이 아닌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퍼진 1348년으로 떨어진다. 수십만명의 사람이 죽었고, 어떤 마을에선 더이상 시체를 묻을 사람조차 남지 않았던 최악의 질병 돌던 시대로 떨어진 것이다. 떠날때 다행히 예방접종을 했지만 그녀가 도착한 마을 사람들은 고통 속에 치료제도 없이 하나씩 쓰러진다.

키브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중세로 갔지만 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으며, 인과관계를 뒤집을 만한 일을 만들 수 없다. 단지 방관자 역할만 할 수 있다는 설정은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에 설득력을 더해주며 동시에 페스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녀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과거와 미래에 다른 듯 같은 설정을 병행 배치함으로써 시대의 변화는 있어도 사람의 삶에는 과장도 미화도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브린이 떨어진 마을에 숲에서 로슈 신부가 그녀를 발견하고 한 영주의 집에서 치료를 받도록 도와준다. 촌스러운 시골 신부인 그를 영주의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늘 묵묵하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페스트가 돌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질병이 나타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돕는다. 잠도 자지 않고, 음식도 먹지 못하면서도 (의미는 없지만)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묻고,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고해성사를 도우며, 묵도를 진행한다.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