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07.06.03 그것
  2. 2007.05.18 근황 2
  3. 2007.05.07 V.R. Space 4
  4. 2007.05.02 [굿 셰퍼드]의 애국심 2
  5. 2007.04.17 캐비닛
  6. 2007.04.12 캐럴예찬 4
  7. 2007.04.11 엄마는 어디에 3
  8. 2007.03.28 추위 4
  9. 2007.03.28 공중그네 2
  10. 2007.03.26 <Little Miss Sunshine>불완전한 가족의 재발견 2
Purslane/서재2007. 6. 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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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논문발표회가 끝나고 머리를 식힐겸 집어들었다가 방대한 분량에 오래 지체되었다. 1800페이지가 넘는 3권짜리 책을 집어들 때는 휴식치곤 너무 긴 것 같아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it)>은 스티븐 킹의 최고의 역작이며 대중소설로서의 흥행과 문학적 성과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찬사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순전히 분량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사소설도 아닌 공포소설을 오랫동안 읽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상권을 읽으며 스티븐  킹은 역시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이 탁월한 작가임을 다시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상,중,하 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특히 6명의 친구들이 전화 한통을 받고 24년전 데리로 돌아가려는 도입부분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실체화 되지 않은 공포를 예민하게 그렸다. 각각의 캐릭터를 그려보게 되는 초반의 묘사는 담담하게 과거의 일을 궁금하게 만든다. 

<셀>에서 평화로운 공원이 폭풍의 전야 같았다면 <그것>의 인물 도입부는 전체의 1/3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전화 한통으로 홀린 듯 어린 시절을 보낸 데리(市)로 돌아가려는 6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진다.

스티븐 킹은 인간의 공포감을 잘 끌어내는 작가이다. 어린 시절에 본 <캐리>, <샤이닝>, <미저리>의 공포감은 강렬했다. 특히 도시의 공포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둡고 눅눅한 지하, 하수구, 쥐, 더러운 먼지들이 한데 뒤엉켜 도시 전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바로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타인이다. 도시의 익명성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위협적 존재이다. 데리 역시 스스로 살아숨쉬는 위협적 대상이며 존재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다.

초반이 무형의 공포에 대한 것이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그것’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 감에 따라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것’은 해리포터의 ‘보가트’처럼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에게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마지막에 최후의 결전에서 드러내는 그것의 모습은 유명한 조형물이 떠올라서 기대가 반감되었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말할 수 없지만)

이 책의 진짜 공포는 아무리 빨리 읽어도 절대 한 호흡에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침대 맡에서 읽다가 책을 내려 놓는 순간 악몽을 꾸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스티븐 킹은 최소한 데이트 약속을 깜박 잊게 만들고, 런던발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뉴욕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워하게 만드는 소설가로서의 목적은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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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5. 1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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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아직 적응단계라 업무가 많지는 않다. 바뀐 환경에 빨리 익숙해지려고 노력중이다. 전철로 7분거리에 있던 학교를 다니다가 한 시간 거리의 회사를 다니는게 걱정 됐지만 생각해보면 여의도로 출퇴근하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전철을 타고 한번에 움직일 수 있어서 오히려 나은지도 모르겠다.

처음하는 일은 어설프기 마련이라 제대로 해보려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려고 해서인지 5일째 눈밑에 경련이 멈추질 않는다. 화요일쯤엔 너무 심해서 인상을 쓸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음도 안정을 찾아간다. 오늘은 출근할 때까지 떨리다가 점심나절부터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작하는 일도 일이지만 논문심사가 코앞이라 마음이 불안하다. 6월 20일이 최종심사결과제출이라 약 한달쯤 남았다고 생각했다가 이달 말로 땡겨지는 바람에 발등의 불이 되었다. 심사하시는 교수님 3분 중 한분은 6월1일-10일, 지도교수님은 11일-20일까지 외국에 나가신단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젠 퇴근길에 논문을 쓰러 학교에 들렀다가 학과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었다. 겨우 일주일만에 보는 것 뿐인데 어느새 한발 물러선 기분이 든다. 이럴 줄 알았잖아라고 위안해도 역시 나는 학교가 좋다. 영화보다 극장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공부보다 그냥 학교를 좋아했던 거다.

잔디밭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수만권의 책 앞에서 고르기만 하면 된다는 기쁨을 누리던 소소한 행복이앞으로 꼭 두달 남았다. (물론 논문이 통과된다는 전제하에서 ;;) 월드컵경기장도 나름 공원이 괜찮다. FC 서울 경기를 할때마다 시끄럽긴 하지만 극장도 훌륭하게 가까운 편이다.

나의 출근이 결정되는 것과 비슷한 시기부터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우리 둘 다 정신없이 바빠졌다. 소홀한 블로그에 미안하지만 도통 여유시간이 안난다. 출퇴근 시간에 전철에서 책과 잡지를 읽는 것이 요즘의 여가생활이다(그중 절반은 잔다). 일이 좀 익숙해지면 여기도 변화가 생길 것같다.

나에게 전환점이 되는 시기인 것은 분명한데, 졸업이 결정되지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아직 실감이 안난다. 정신없이 확 바뀌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차근차근 변화해나가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하고 있다. 한번에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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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극장대기실2007. 5. 7. 21:57
012

요즘 학술정보관에 있는 V.R. Space에 매일 출근(?)중이다. DVD를 꽂고 볼 수 있는 컴퓨터가 설치된 곳은 많지만 이렇게 제대로 TV를 갖추고 편안하게 앉아서 볼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다. 4개의 좌석이 설치되어 있고 파티션으로 살짝 가려진다. 쇼파에는 2명씩 앉아서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볼 수 있다.

가져온 DVD가 있다면 좌석만 예약하고, 아니면 학교에 있는 DVD도 대여가 가능하다. 아침 일찍 가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조용한데다가 대체로 나처럼 혼자 와서 보는 경우가 많다. 12시쯤 영화가 끝나고 일어날때가 되면 가끔 커플도 보인다.

조용하고 쾌적한 시설도 마음에 들지만 처음에는 무엇보다 의자에 감동받았다. 우퍼가 내장된 매트리스여서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을 볼때는 배에 탄 것처럼 멀미 할 뻔했다. 파도가 칠때마다 엉덩이와 등을 쉴새없이 둥둥둥둥 두드려주는 바람에 나중에는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즐기게 된다. 쩝.

이제 졸업하면 이런 즐거움도 사라질까 싶어 부지런히 조조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출근 중이다. 영화가 많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아쉽지만 어차피 못본 영화만 골라서 보아도 다 못볼 것같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보면 또 멀미가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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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극장대기실2007. 5. 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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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국심이 늘 신기하다. 종교적 믿음과 애국심이 동격이 되는 사람들. God 앞에 the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CIA 앞에도 the를 붙이지 않는다는 말은 얼핏 오만함으로 보인다. 그들에겐 그것 자체가 이념이다.

윌슨은 늘 정직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어린 윌슨에게 신뢰를 쌓지 못하면 친구들을 얻을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절대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다.

엘리트 학생이었던 윌슨은 미국 최고의 비밀결사단체 해골단 가입하게 된다. 모임의 연대감은 대단하다. 해골단의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정기 집회를 하는 모습은 따뜻한 파티를 연상시킨다. 단체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선후배와 동료들의 믿음을 가지기 충분하다.

그러나 윌슨의 부인 클로버는 늘 해골단이 신보다 먼저 호명된다고 빈정거린다. 그들은 충성을 맹세한 후에 신에게 기도한다. 미국인의 저항적 프로테스탄티즘은 미국의 국가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아일랜드와 폴란드인들만큼이나 높다. 미국인은 압도적으로 하나님과 국가 모두에 헌신한다. 하나님과 CIA, 해골단을 그렇게 연결된다.

믿음과 신뢰로 유지되는 비밀결사단체는 CIA와 유사하다. CIA에서 일하라는 제의를 하러온 로버트 드 니로는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유태인과 흑인, 일부 가톨릭은 제외된다는 농담을 덧붙인다. 진짜 미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은 앵글로-개신교도뿐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아무에게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밝힌다.

영화의 중간쯤 팔미의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윌슨에게 "이탈리아인에겐 가족과 신앙, 아일랜드 인에겐 고국, 유태인에겐 전통, 심지어 흑인에게도 음악이 있다. 우리에겐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 나머지는 그저 방문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CIA와 해골단이 부르짓던 애국심 고취는 우파적이고 군사적이며 남성, 백인, 앵글로 그리고 압제적인 것이다. 군사적 특성을 가지는 애국심은 적이 사라지면서 대상을 잃었다. 미국인들은 신기하게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국가적 자부심을 높게 가지고 있다. 그들이 표현하는 자부심은 온건하게 보이는 유럽인들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이다.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타자가 사라지자 자유적이고 민주적인 미국의 신조가 흔들렸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은 콩고에서 결혼할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흑인이다. 아버지는 당황한다. 그녀가 얼마나 영리하고 사랑스러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윌슨은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내 그동안 해왔던 방식으로 정리한다.

절규하는 아들 앞에서 더 이상 그런 식의 정리는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 아들은 초국가적 정체성을 가지는 세대이다. 윌슨으로 대변되는 미국에게 이상적인 적은 이념적으로 적대적으로 인종적, 민족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제기하는 대상이었다. 이제 그런 정체성은 모호해졌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주니어가 흑인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윌슨이 근무하는 CIA는 007처럼 멋지지 않다. 정부의 권력이 응축된 집단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냥 소시민에 가깝다. 집을 나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양옆에 서 있는 다른 남자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시를 쓰던 소년은 평생 무뚝뚝한 표정으로 살아왔지만 어디에서부턴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CIA 건물을 빠져나가는 윌슨의 뒷모습은 친구도 조국도 없이 혼자가 되는 최대의 두려움을 현실로 맞닥뜨리기 직전이다. 어떤 애국심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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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발표회가 끝나고 영화를 장장 세시간 정도 보고 있자니 쪼끔만 본드처럼 멋졌으면 머리가 덜 피곤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가끔 총이라도 쏴줬으면 무표정한 맷데이먼을 원망하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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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서재2007. 4. 1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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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러운 거짓말쟁이가 나타났다. 정교하게 속이지 않아서 좋다. 거짓말 인줄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주고 싶은 능청스러움.


책 <캐비닛> 날개에 날린 작가 소개에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고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그냥 평범해 보였다. 정규 교육을 받고 글쓰는 재능이 있어보여 몇 년 더 공부했나보다 싶었다. 물론 긴 글을 쓰는 지난한 과정은 생략되어 있겠지만.


그러나 <캐비닛>을 다 읽고 뒤에 붙은 심사평을 대충 넘긴 후 전경린씨와 함께한 수상작가 인터뷰를 보면서 나의 섣부른 판단을 반성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또 존재하는 구나 싶었다.


도시의 하층민 생활을 경험하고, 막노동판에서 일하다가 25살에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려웠겠지만 글쓰는 ‘일’을 하는 2년간 매달 오십만원을 지원해주던 친구가 존재했고, 그러면서 산이나 집에 틀어박혀서 확신도 없이 몇 년씩 글을 쓰는 끔찍한 과정을 자진해서 시작하다니. 움직일 돈이 없어서 앉아서 글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은 대입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에브리데이가 할리데이였지만 암흑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욕심이 별로 없었다. 한달에 팔십 만원정도면 어슬렁거리며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대신 소설을 시작하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위가 헐고, 등짝이 아프고, 편두통과 눈이 아플 정도로 글을 쓰며 부족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16km를 걷는다.

그는 말한다. 능청스러운 거짓말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있는’ 것을 ‘있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있게 만드는 최대의 적은 ‘작가’다. 그는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존재이다. 서술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캐비닛>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상피에르의 루저 실바리스처럼 유일한 생존자이며 서술자지만 그래서 진실을 검증할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다. 독자가 진짜 같지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능청스러운 거짓말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더 풍요로워진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나는 책을 덮고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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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4. 12. 14:51

8시 55분 학교앞 전철역.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택시들이 보인다. 이미 5-6대의 택시가 아슬아슬하게 1교시 수업에 뛰어가는 학생들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이다. 책을 껴안고 종종 걸음을  하는 학생들 무리가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도서관을 향해 걷는다. 경영대 앞 물소리도 들리고, 잔디도 제법 파래졌다. 도서관 로비는 아직 한산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주섬주섬 열쇠꾸러미를 꺼낸다. 내 방은 4J. 4J라고 쓰인 열쇠를 미리 집어둔다. 캐럴 입구에서 부스럭거리기 미안해서 늘 장전을 하듯 준비해둔다.

4층에 도착하면 3열람실로 들어간다. 작은 파티션이 쳐진 널찍한 열람실이다. 일찍 온 학생들은 이미 구석자리를 선점했다. 대부분 영어책과 두툼한 각종 고시책이 놓여있다. 열람실 제일 안쪽이 캐럴 입구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있다. 10명의 이용자중 내가 제일 처음 왔다는 의미다. 통합키로 바꿔쥐고 얼른 문을 연다. 입구의 문은 육중하다. 손을 밀어도 얼른 닫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면 마지막 순간에 '철컥'하며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힘들어도 꾸욱 밀어서 가능하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

문 바로 앞이 내 방이다.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공간이지만 일단 문을 닫고 들어가면 매우 아늑하다. 상의를 의자에 걸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살살 넣는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와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서 다시 들어간다. 일단 컵에 물은 붓고, 쿠션을 등에 놓고 무릎담요를 치마 위에 얹는다. 이제 한 세시간은 안움직여도 된다. 의자는 적당히 편안하고, 열람실보다 환기도 잘 되는 편이다.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해야 할 분량을 정하고, 수첩을 보며 일정을 확인한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잠시 읽다만 소설책이나 잡지를 뒤적거린다. 이렇게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아니 사실 행복하다. (공부의 진행정도와는 관계없이;;)

이제는 밖에서 힘든일이 있을 때도 캐럴이 생각난다. 아무게도 방해 받지 않고, 조용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란게 살면서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 학교에 오고 싶어서 아침일찍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 운동이고 뭐고 그냥 콕 박혀 있고 싶어서 아무데도 못가겠다. 이젠 학교에서도 한가하게 누구를 만나서 낮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9시에 도착해서 밤 11시를 꽉 채우고 나가도 마음이 편하다. 배도 별로 안고프고, 책은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덩달아 시간도 금방 간다. 실은 잠도 너무 잘 온다.

7월까지라는 한정적인 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직장은 물론이고 집에서조차 자기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힘들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이 마음편히 방해받지 않는 자기 공간이라니. 캐럴을 쓰기 전엔 이 정도로 좋을 줄 몰랐다. 두달만에 나는 캐럴 예찬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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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극장대기실2007. 4. 11. 12:04

이번 주 영화 잡지가 배달되어 왔다. 일단 봉투를 뜯고 표지를 슬쩍 살핀 후 휘리릭 넘겨본다.
첫 광고는 박신양과 요즘 한국의 다코타 패닝이라고 불리는 서신애양의 영화 <눈부신 날에>. 나쁜 아빠와 이쁜 딸이라니 아빠가 속 좀 썩이는 모양이다. 날건달이란다. 아 식상해. 두 번째 광고는 <아들>. 이번엔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 아빠도 교도소에 있다가 하루 외출을 나왔단다. 15년 만에 아들을 만났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다. 감독과 각본이 장진이지만 감동을 만들려는 게 광고 컨셉인지 영화 내용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다음은 기다리던 대니 보일의 <선샤인>. 이건 봐야지. 그러나 지면 광고는 시뻘게서 촌스럽다. 감독 이름이 없었으면 0.5초만에 넘겼을 것이다. 몇 장 넘기니 또 아빠랑 동구가 나란히 턱을 괴고 있는 <날아라 허동구> 광고가 보인다. <말아톤>과 <아이엠샘>을 카피에 넣은 걸 보니 동구는 좀 모자란 녀석인가보다. 아버지가 고생이 많으시겠다.

바야흐로 따땃한 가족의 달이 코앞이다.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거침없이 외치는 철딱서니 없는 딸내미에게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보여주는 것 정도로는 모자란가. 그래도 <우아한 세계>의 인구네 가족은 황진미씨의 말마따나 이건 가정이 깨진 것도 아니고, 안 깨진 것도 아니다만 앞으로 나올 영화들엔 어디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골치아픈 남편들을 뒤로 하고 단체로 가출이라도 하셨나보다.

최근 한국 영화는 가정과 직장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열정을 쏟던 거대한 아버지가 소시민으로 전락하고, 가정에서도 자리를 찾지 못하는 소외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아버지들은 어느새 엄마도 밀어내고 가족의 중심에서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잘 될 리가 없다. 그들에게 가족은 조건이다. 이상향을 설정하고 열심히 앞으로 가지만 가족 외적인 질서는 여전히 마초적이고 아버지는 돌진하고 부딪히고 다시 깨진다.(조폭은 정말 그럴듯한 설정이다)

자기 연민에 빠진 남성성을 회복하겠다고 역경을 딛고 일어설 힘을 혈연에서 찾는 이야기가 지겹다.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무너져 가는 현대적 가족의 위기를 운운하며 우리 식구 오순도순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양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다가 최후의 방어선인양 혈연을 붙잡는 것도 불편하다. 언제까지 그 무력함을 받아주고 이해해 달라고 칭얼거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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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3. 28. 19:14
춥다. 학교에서 난방을 틀어주고, 연구실에서는 개인 난로를 다리 밑에 갖다 두었는데도 계속 춥다. 뭐 하루종일 연구실에만 있을 수 있나. 밖에 나가면 또 춥다. 근데 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얇은 블라우스하나, 짧은 반바지 하나, 스타킹도 아닌 맨살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나는 지난 주까지도 아침마다 겨울에 입던 코트를 만지작 거렸다. 티쪼가리에 미니스커트 입고 다니는 애들 사이에 코트를 휘날리며 다니기가 민망해서 결국 한번도 못입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대체 나만 추운거야!를 마음 속으로 외쳤다.

목요일을 즈음하여 학과 사무실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동지들에게 나의 심정을 토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그렇다는 위로와 더불어 삼십줄에 들어섰다는 증거라는 등의 좌절 섞인 공감이 쏟아졌다. 그래서 오늘 비록 잠바를 입었지만 목도리를 했다거나, 사실은 이 속에 티셔츠가 하나 더 있다는 고백들 사이로 내복도 한명 있었다. 아. 다들 추웠구나? 이런.

그리고 금요일엔 도서관 앞에서 긴 코트의 여성을 발견했다. 아,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손이라도 잡고 인사하고 싶었다. 역시 얼굴을 보니 내 또래쯤 된 것같다. 역쉬.. 이 학교를 활보하고 다니는 아해들은 우리보다 무려 10살쯤 어리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어제도 정신 못차리고 니트하나 입고 나왔다가 저녁무렵에 미열이 있었다. 집에 가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오렌지 주스와 쌍화차를 잔뜩 마시고 배불러서 잤다. 오늘아침에는 그 위에 옷을 하나 더 껴입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왠 우박섞인 비가 내리는 것이냐. 약속한게 있어서 점심을 먹고 리움으로 향했으나, 여전히 춥다.

초대해주신 선생님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리니 회의를 하다 말고 도록을 챙겨서 내려오신다. 나는 나만 연락을 받은 줄도 모르고 동네방네 워홀전도 보고 도록도 주신다더라고 말했다가 다행히 3명만 같이 가게 되어 그나마 몇부 남지 않은 도록을 잘 챙겨왔다.

전시를 보고 카페에 앉아서 오랜만에 여유있는 오후를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나이 얘기가 나왔다. 십년만에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지하게 어색하다. 게다가 겨우 3개월밖에 안되지 않았나. 이젠 추운것도 나이탓이고, 푸석푸석한 피부도 나이탓이고, 숙취도 나이탓이고, 나쁜 머리도 나이탓이 되는 모양이다.

보기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가 작년까지는 '동안이시네요'로 들렸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으시네요'로 들리니 그것도 나이탓인가.. 그러고보니 나이가지고 구시렁거리는 것도 나이탓이다. 아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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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3. 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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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의 강박증은 『공중그네』처럼 주로 남성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별과 관계없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부풀려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초월한 의사 이라부만이 여유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소아과에서 아이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싸우는 의사라니. 그야말로 치료의 대상 아닌가. 강박증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진짜 환자의 속을 꿰뚫고 의도한 치료였다면 그는 천재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라부는 확실히 정신병이다. (정신병은 천재에게 많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많이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으며, 환자들에게 좋은 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도시에 사는 우리는 누구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밖으로는 거대해 보이고 싶어서 왜소한 모습을 감추려 한다. 하루에도 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쳐야하고 그 속에서 나라는 인간을 각인시키고, 다시 적당히 지우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공중그네』의 주인공들은 그럴듯한 직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강박증을 말할 수 없어서 조용히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상담을 통해 스스로가 그린 거대한 모습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발견한다.

『공중그네』이야기는 광고문구처럼 유쾌했지만 이라부의 병원은 무서웠다. 어쩐지 상담이라도 받으러 가면 생글생글 웃으며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만 시키면서 괴롭힐 것 같다. 그는 치료를 받으러 온 어떤 캐릭터보다도 매력적인 의사지만 옆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어렵다. 소심한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그런 성격을 가지면 사는데 장애가 많아진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이라부에게 보장된 앞길이 없어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어쩐지 딴죽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커다란 몸집으로 어떻게하든 될대로 되겠지 하는 표정으로 공중그네를 타고, 캐치볼을 하고, 엉망진창인 글을 쓰는 그 모습에 다들 반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에서 무얼 본걸까. 궁금했다. 강박증에 걸린 환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정도는 다르지만 자신의 자화상으로, 의사 이라부는 이상형으로 보기라도 한 걸까. 글래머 간호사의 비타민 주사 한 대만 맞으면 나도 마음이 편해질 거라는 상상을 하며.

Posted by Purslane
Purslane/극장대기실2007. 3. 2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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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미스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 2006)은 코르셋처럼 강력한 규범들의 틈새를 보여준다. 완전한 실패자들의 모임처럼 보이는 이 가족의 여행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어정쩡하게 느껴지는 간극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며 서 있는 모습 때문이다. 이 어설퍼보이는 사람들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는 동안 그들은 대견하게도 견고해보이던 사회의 규범들의 틈새에 잘 자리를 잡는다.

이들은 정상적인 가족관계가 무엇인지 까먹은 모양이다. 모양은 그럴 듯 했다. 아빠, 엄마, 비행기조종사가 되고 싶은 오빠 드웨인, 어린이 미인대회 준우승을 한 귀여운 딸 올리브. 여기에 헤로인을 하다가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고, 자살 미수로 막 퇴원한 프랭크 삼촌이 합류하면서 어쩐지 이상한 가족에 실패자 기운의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이들을 보면 따뜻하게 보듬으며 서로 기운을 북돋워주는 관계가 실제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항공학교에 보내달라며 묵언수행으로 시위 중인 드웨인은 프랭크에게 ‘Welcome to Hell'이란 말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들을 걱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관객이다. 우리는 따뜻한 가족이라는 허구의 실체를 그리고 어떻게 저런 가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우려한다. 아버지는 실패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고, 엄마는 피로에 젖어있고, 자동차 뿐만 아니라 이 가족에게는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어 보인다. 정작 이 독립적인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향한 노력은 각자 대단하다. 어느 누구도 서로를 놓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동체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간다. 현대의 가족은 계속 존속하지만 점점 허약해지고 있으며, 이 ‘허약성의 정상화’가 가족의 미래이다. <리틀 미스 선샤인>의 구성원들은 이것을 정확히 드러낸다. 가족은 의존과 독립의 단계를 반복해서 거치면서 자란다. 전통적 가족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끝까지 어설픈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 올리브 가족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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