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07.02.21 The Soul of a Man
  2. 2007.02.21 Aeschylus' Oresteian Trilogy
  3. 2007.02.21 빌러비드
  4. 2007.02.21 둠즈데이 북
  5. 2007.02.21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6. 2007.02.21 서재 결혼 시키기
Purslane/극장대기실2007. 2. 2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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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다시 돌아온 빔벤더스 감독. 이번엔 Blues다. 그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극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머나먼 저 우주 끝 어딘가까지 전달될 블루스의 향연. 좀 생소하지만 전설적인 블루스의 거장 Skip James와 J. B. Lenoir의 음악이 재탄생되는 장면을 두시간동안 지켜보았다. 그 블루스의 아름다움은 말해 무엇하랴.

백인들은 Jazz Age를 맞이하고 술로 흥청대던 Lost Generation들로 혼돈스럽던 미국의 1920년대에 흑인들은 조용히 노래를 읖조리고 있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계속 되는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스스로의 모습을 유례가 없을만큼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에게 음악만큼은 백인이 흑인을 넘어설수 없는 분야이다.

블루스는 블루스를 가져야만 표현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노예제를 통과한 미국 흑인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블루스에는 우리가 '한'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먹을것도 없이, 집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이끌고 길거리에서 고통스러운 외침을 뱃어내는 제2의 제3의 말콤엑스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창백한 옷을 입은 유령같은 KKK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흑인들의 일부나마 이해하고 싶어진다.

미국의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건너와서 해방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흑백갈등, 인권, 법적차별등을 겪었다. 최근에 와서야 이런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면서 흑인내부의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제 자기치료와 그동안의 수많은 경험들은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가 그들의 문제이다.

Skip James도 J. B. Lenoir도 이미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큰 획을 그엇는지, 얼마나 많은 뮤지션들이 그들의 음악에서 블루스의 정수를 느끼는지 모르고 사라졌지만 우주 저멀리 어디선가 듣고 있겠지. 보이저호도 도착하지 못한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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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서재2007. 2. 2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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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 천병희 역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10.01

그리스 비극 Aischylos

아이스퀼로스Aischylos는 그리스의 유명한 비극작가이다. 그는 BC525-426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의 아들로 출생하여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했었고, 애국심이 대단하여 자신의 운명과 아테네라는 국가의 운명을 동일시하였다. 디오니소스 연극 축전 비극 경연 대회에서 40세에 첫 우승을 하였으며, 중간에 한번 소포클레스에게 우승을 뺏긴 적이 있을 뿐 평생에 걸쳐 14번의 수상을 하였다. 그 중 오레스테스 3부작은 마지막 작품이며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비극작품은 3~4편이 한 작품이되므로 52편으로 상을 받고 총 70여편을 썼으나, 제목만 남아있고『페르시아인들』(472),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영웅』(467), 『오레스타에아 3부작』(458), 『탄원자들』,『결박된 프로메테우스』7편만이 전해진다.

기원전 5세기에 비극은 유독 아테네에서만 100여년간 융성했다. 이는 기원전 5~6C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정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종교로 받아들여졌던 신화체계에 합리주의가 더해지면서 비극이 창조되었다.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무너지고, 당대 소피스트에게 신화는 거의 무신론에 이를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신화는 정치가들이 백성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에 불구하며 신화는 허구라고 믿었다. 이러한 극단적 상대주의와 나름의 합리주의로 인해 신들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비극 작가들은 이런 생각으로 폴리스의 이념이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합의를 찾으려는 노력을 비극을 통해서 이루었다. 그러므로 비극에는 갈등의 화합과 타협이 주요한 주제가 된다.

질서의 회복

오레스테스 3부작은 플롯이 단순하다. 아가멤논의 죽음, 오레스테스의 복수, 복수 이후의 오레스테스로 이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신의 정의와 신의 질서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드러난다. 아버지를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오레스테스의 갈등은 흔히 햄릿의 그것과 비교된다. 「아가멤논Agamemnon」이 시작하면서 파수병의 대사 역시 햄릿의 도입부와 비슷하다. 그러나 햄릿이 복수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을 하는 것에 비해 오레스테스는 복수가 정당한지, 어머니를 죽여도 되는지에 대한 논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가멤논이 죽은 것 자체가 최고 질서에 파괴를 의미하므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은 비록 어머니의 죽음이라하 더라도 정당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행동 역시 복수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일방적인 비판을 할 수는 없다. 트로이 전쟁을 위해 배를 띄웠으나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움직이지 않자 아가멤논은 막내딸 이피게네이아를 재물로 바친다. 그녀는 10년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라를 지켜낸 여왕으로서의 풍모와 지혜를 가졌으나 한편으로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한없이 길어진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으며, 고통을 받기는 전쟁터에 있는 백성이나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을 대신해서 통치를 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그만한 품위가 갖춰져 있었음을 알 수있다. 「아가멤논」초반의 코러스장과의 대화를 보면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정세에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아가멤논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복수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므로 그녀는 왕비의 품위와 함께 복수하는 비장함도 가져야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이 가지는 가장 큰 요인은 오만함이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일때 코러스 장의 말을 무시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지키고자 한 질서는 모계적 질서로 대변된다. 딸의 죽음에 복수를 하므로서 혈연적인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로 상징되는 질서는 자연의 질서, 피의 질서이다. 그러나 비극에서 좀더 중시되는 것은 부계적 질서이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아가멤논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질서의 회복에 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도시국가의 일원으로서 질서의 상징인 부왕의 복수에 대한 승인은 정치적, 애국적인 주제이다. 어떻게 폴리스의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대의 명분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이러한 두 세계는 협소한 자아와 우주적 질서의 충돌로 연장된다. 비극의 세계관에는 낙관주의가 있는데, 이는 고통을 통해 인간이 올라 설수 있으며,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질서의 회복을 중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주의적 세계관이 성행하던 중세에는 비극이 거의 없었다. 지상에 아무리 끔찍한 일이 있더라도 그 위에 신이 있으므로 죽음의 삶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이 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지상에서의 카타르시스를 둔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비극이 성행할 수 없었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오히려 다시 비극이 부활하게 된다. 고대 비극이 마련된 비극이며 운명적 상황이었다면, Shakespeare의 비극에 드러나듯이 이 시기의 비극적 상황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개성, 고유의 본성 때문에 일어난다. 

새로운 질서와의 조화

오레스테스 3부작을 마무리하는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제우스로 대변되는 새로운 질서의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복수의 세 여신들이 어떻게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하는가가 3부의 중심이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이 맞선다. 여기에 아테네가 판관 구실을 하게된다. 부계사회위주의 올림수프에서도 젊은 신을 옹호하는 것이 아폴론이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도 결국 아가멤논을 죽인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인 복수로 인정한다. 반면 복수의 여신들은 어머니(Gaia, 대지의 신)가 모든 것을 대변하던 구세계의 신이다. 그들은 제우스의 부계질서 이전의 신이므로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복수의 여신들의 판단이 있기 이전에 이미 아폴론은 오레스테스의 행동이 폴리스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죄를 사했다고 말한다.

 일련의 재판과정은 아무리 아폴론이 내린 명령이라 하더라도 복수의 여신들에게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토론의 방법을 통해 설득하는 과정이다. 아테네나 아폴론은 젊은 신이고 복수의 여신들은 늙은 노인들이다. 그들은 새 세대의 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에 노하고 있다. 아테네 역시 여신이기는 하나 어머니가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으므로 결혼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아버지를 대변하는 신이다. 결국 투표로 가부동수가 되었으므로 아테네가 무죄를 선언하나 Eumenides는 인정하지 않는다. 폴리스는 국가의 위엄이 최후의 보루이다. 오레스테스가 결국 무죄가 되는 것은 결국 힘의 논리로 밀린 결정으로 볼 수 있다. 무승부인데 무죄를 선언한 아테네가 생각을 못박았기 때문일 뿐 사실상 한계가 있는 딜레마이다. 오레스테스의 입장에서는 아테네의 은총일 뿐이다.

결국 아테네가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설득을 하므로서 복수의 여신들은 자비의 여신이 된다. 그들은 제우스의 통제하에 위치는 인정하되 지하로 내보내진다. 아테네는 그들을 적당히 달래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신 중심의 가치관은 아테네에 정착한 민주주의와 소피스트의 합리주의·과학적 사고방식이 시화와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도기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가 신화로 한발 물러나는 단계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제우스의 질서를 옹호하며, 우리의 당면과제는 그것과의 조화에 있다고 여긴다. 권력의 변화에 과거와 현재의 세대가 필요하며, 여신들의 요구도 어느정도 충족시켜주므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비극이라는 공연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연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스킬로스는 수만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관용과 용서의 감정을 유발함과 동시에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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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Aeschylus' Oresteian Trilogy를 읽을 수 있는 곳


[Agamemnon]  http://classics.mit.edu/Aeschylus/agamemnon.html
[Choephori]  http://classics.mit.edu/Aeschylus/choephori.html
[Eumenidides]  http://classics.mit.edu/Aeschylus/eumendid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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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서재2007. 2. 21.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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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i Morrison/ 김선형 올김/ 들녘/ 2003

「빌러비드beloved」는 1851년 신시네티Cincinati에서 있었던 마가렛 가너Margaret Garner라는 흑인노예여성이 자기 자식을 죽인 조그만 사건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이 사건에서 흑인 내부의 문제, 노예문제, 그리고 여성의 문제를 보았다. 어린 딸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선택에 우리는 함부로 비판을 가할 수 없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물론 할말은 없지만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다.

흑인은 미국내 소수민족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노예 역사는 길지 않지만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 문학에 있어서도 흑인 문학의 비중은 크지 않다. 반면 솔 벨로우Saul Bellow등 유태계 문학은 20세기 미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태인들만이 가진 방랑자의 역사, 소수민족의 특수성, 홀로코스트의 경험 등이 문학작품에 등장하면서 주목을 받아왔다. 최근 유태인들이 미국사회의 핵심에 많이 편입하면서 유태문학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주류가 되면서 강자의 위치로 서서히 변해가게 되었다. 흑인의 경우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쉽게 떠오르는 엉클 톰의 이야기도 백인이 다룬 흑인문제이지 흑인 자신의 경험은 아니다.

미국 내에서의 흑인들은 특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온 개척자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바다를 건너왔다. 미국 도착해서도 혹독한 노동을 하고 하나의 잔인하게 다뤄지면서 독특한 감수성을 형성했다. 해방이 된 후 여전히 인종차별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 와서야 제도적 장치로 흑인의 사회, 교육 환경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최근 대학에서는 흑인쿼터제를 사용하기도 해서 백인들이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흑인들의 역사가 소설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은 백인의 소설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표현된다.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미국인(American Citizen)으로서의 정체성 찾기에 주력한다. 흑인문학은 1960~70년대 미국 내에서의 흑백 갈등, 흑인의 인권, 법적차별에 관심을 가지다가 최근 많이 해결되면서 흑인 내부의 문제, 자기치료, 수많은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많은 인종이 하나로 융화되는 melting pot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melting salad라고 말하기도 한다.

「빌러비드」는 노예해방령이 선포되기 전인 1856년에서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남부재건이 끝날 무렵인 1874년 사이를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쎄서Sethe는 처참한 고통을 경험하고 임신한 상태로 모유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두 아들, 딸과 함께 임신한 몸으로 탈주에 성공하지만 노예주인 선생(school teacher)에게 발각되자 이제 막 걸음을 뗀 딸을 죽인다. 소설은 이 사건이 일어난 17년 후에서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그 이후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쎄서는 다른 흑인들과 교류도 없어졌다. 귀신들린 집으로 불리는 그 집은 계속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두 아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난다. 탈출할 때 뱃속에 있던 덴버만이 엄마와 함께 고립된 집에서 살아간다. 쎄서는 자기의 손으로 목숨을 빼앗은 아기의 영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7년 만에 사람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여자아이가 집에 찾아오고, 쎄서는 그 아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치유한다.

실제 사건이 일어날 당시 마가렛 가너에게는 남편과 여러 흑인이 같이 있었으나, 소설에는 남성의 존재가 아예 사라진다. 함께 하기로 했던 남편은 결국 탈출에 실패하고, 쎄서를 감싸주던 폴 디Paul D 역시 사건을 알게 된 후 쎄서를 떠난다. 자상한 남편의 역할을 할 것 같던 그도 사건을 감당하지 못한다. 대신 빌러비드를 만난 후 조금씩 마음을 여는 쎄서에게는 마을의 흑인 여성들의 손길이 닿는다. 모리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아니라 흑인의 연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쎄서는 농장에서 유모역할을 했지만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인자한 모습이 아니다. 근대 서구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은 여성은 가정의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도 정치나 기업 경영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슨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가정을 지키는 여성의 역할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강조하고 있다. 쎄서의 시어머니인 베이비 석스는 동네사람들에게 뭘 해서 먹이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렬한 연설을 하고 집회를 주관하는 한편 전통적 여성의 역할이라 여겨진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모리슨은 남녀 성 역할을 전통적 역할에 매어두지 않으면서 여성의 전통적 모성 역할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쎄서나 베이비 석스는 가정 내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강하고 적극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빌러비드 역시 유령인지 진짜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흑인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그녀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노예제와 연관된 역사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집단적 무의식이다. 빌러비드를 죽인 쎄서가 죄의식의 화신이라면 빌러비드는 욕망과 불만족을 가지고 있다. 쎄서가 빌러비드를 통해 잊고 싶고, 억누르고 있던 죄의식을 일깨우고 속죄하는 것을 그래서 이다. 쎄서는 그녀를 통해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야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기법에서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사용하므로서 쎄서의 기억의 파편들의 조각을 드러낸다. 모리슨이 re-member라고 부른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한편 복원하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경험을 기억하되 그것을 직시하고 개개인의 삶에서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잊지 말 것을 강조한다. 흑인의 종족적, 개인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주체로서 작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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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서재2007. 2. 2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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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 / 최용준 역 / 열린책들 / 2005


도서관에 가면 아무래도 전공서적 근처를 가장 많이 가게 된다. 지금은 전공 자체가 워낙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서 인문학, 어문학, 사회학, 예체능계열 서적을 다 찾아다니고 있지만 학부땐 수업관련 서적은 영문학관련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 구석에 처박혀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책 번호 따위를 찾을 필요도 없게 될만큼 작가별, 분야별 위치가 머릿속에 그려지게 될무렵, 수업시간에 체크해두었던 소설을 한권씩 골라 읽으면서 열람실에서 여유를 부리는게 젤 행복했다.

현대 미국 소설과 영국 소설은 앞뒤칸으로 꽂혀있었는데, 중간쯤 슬쩍 꽂힌 현대 소설들이 있었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들이며(몇십년 후엔 모르겠지만) 폴 오스터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간간이 눈에 띄는 정도이다. 물론 핑크빛 꽃무늬로 장식된 미국 로맨스 소설이나 SF, 스티븐킹의 소설등도 있었다.

가끔은 교과서에 없는 소설을 읽고 싶을 때가 있지만, 수첩에 읽어야할 책 목록을 적어두었다가, 하나씩 지우는게 취미아닌 취미여서 도서관에서 충동구매(?)는 쉽지 않다. 4권쯤 뽑았다가도 (알바하는 사서들에겐 미안하지만) 3권은 다시 내려놓고 오게되는 것이다. 그 책 중에 하나가 코니 윌리스의『개는 말할 것도 없고To Say Nothing of the Dog(Bantam, 1998) 』였다.  녹색 양장을 하고 생뚱맞게 꽂혀있는 이 두툼한 개에게 눈이 가면, 이 정도 제목은 읽어줘야 할 것같은 마음에 만지작 거리다가도 다소 묵직한 모양새에 내려놓기를 여러번했다.

그러다 이번에 큰 맘먹고 도서관에 갔는데, 3편의 연작중 세번째인 '개'는 어디로 놀러가고, 두번째 장편 『둠즈데이 북』이 꽂혀있었다. 번역은 나중에 됐지만 앞서 쓴 책이라니 먼저 읽어도 좋을 듯싶어 일단 데리고 나왔다. K군의 표현을 빌자면 '그 사전같은 책은 뭐니?'였지만 지난 일주일간 2개의 사랑니를 뽑는 고통을 잊게해준 친구였다. 코니아주머니의 유머감각은 단연 최고!

중세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키브린은 홀로 중세로 떠난다. 치밀한 계획을 하고 떠났지만 기술자들의 계산 착오로 1320년이 아닌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퍼진 1348년으로 떨어진다. 수십만명의 사람이 죽었고, 어떤 마을에선 더이상 시체를 묻을 사람조차 남지 않았던 최악의 질병 돌던 시대로 떨어진 것이다. 떠날때 다행히 예방접종을 했지만 그녀가 도착한 마을 사람들은 고통 속에 치료제도 없이 하나씩 쓰러진다.

키브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중세로 갔지만 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으며, 인과관계를 뒤집을 만한 일을 만들 수 없다. 단지 방관자 역할만 할 수 있다는 설정은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에 설득력을 더해주며 동시에 페스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녀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과거와 미래에 다른 듯 같은 설정을 병행 배치함으로써 시대의 변화는 있어도 사람의 삶에는 과장도 미화도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브린이 떨어진 마을에 숲에서 로슈 신부가 그녀를 발견하고 한 영주의 집에서 치료를 받도록 도와준다. 촌스러운 시골 신부인 그를 영주의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늘 묵묵하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페스트가 돌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질병이 나타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돕는다. 잠도 자지 않고, 음식도 먹지 못하면서도 (의미는 없지만)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묻고,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고해성사를 도우며, 묵도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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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서재2007. 2. 21. 23:10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Life will find a way)"


두 영역의 만남

인문학자와 생물학자의 만남이라는 [대담]을 처음 본 것은 어느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책은 좋아해도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따분하다. 한줄 한줄의 미묘한 재미를 가진 책이라도 뭉뜽그려 소개하다보면 이상하게도 고만고만하고 지루한 소개가 된다. (일부를 뚝 잘라서 읽어주는 낭독 프로그램도 졸린 음악과 어두운 조명과 착한 목소리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한 MC의 목소리로 왠만하면 채널을 돌리게 된다) 이때는 출연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글말과 입말이 다 재미있기란 참 힘든 모양이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을 소개하는 그때는 대담을 나누신 두 분이 나오셔서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대화를 보고는 한번쯤 읽어봐야지하고 별렀더랬다. 이게 바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이지.

인문학이든 경제학이든 공학이든 사실 모든 연구는 모로가도 서울, 아니 모로가도 인간이 아니겠는가. 어떤 학문 분야든 결국 인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가고 있으면서도 서로 오랜 시간 멀고 먼 가지를 뻗어가다보니 접합지점 역시 멀리 에둘러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문학과 생물학이라니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생물학자로서 대담에 참여하신 최재천 선생은 이제 단순히 학제 ‘간inter'연구도, 여러 학제를 단순히 통합하는 ’멀티multi'학문으로도 부족하며 단순 조합을 넘어 ‘트랜스trans’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계속 그 시점을 늦추고 있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 더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있으리란 아쉬움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도 쉽게 트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에서 “과학과 기술, 종교와 예술은 삶의 토대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이 네 가지 활동 영역은 종교와 예술로 분류되는 성찰적 행위와 과학과 기술로 분류되는 창조적 행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결국 이 인간의 활동이 바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구분선을 긋고 서로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생물학은 인문학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많은 신화에서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해 왔고, 생물학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 왔다. 죽음을 고민하고 죽음을 연구하는 두 학문의 만남은 그래서 접점을 찾게 된다. 삶과 죽음, 생명의 유한성과 영혼, 진화론과 선택, 프로이트의 무의식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두 분이 부딪히는 지점은 의외로 꽤 재미있다. (가끔 어깨를 들썩이며 웃느라 혼났다)

인간의 불멸에 대한 욕구

수많은 오류를 저질러온 생물학은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과오와 편견을 만들어냈고,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많은 생물학자들은 여전히 사회의 불평등을 보증한다는 혐의를 받는다. 과학과 이성으로 ‘귀신’을 몰아냈다고 여기지만 ‘귀신’들은 여전히 뒷문으로 들어와 있고,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유한성 문제로 연결된다. 인류 최초의 서사에 등장하는 길가메시 왕도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나고, 기독교에서도 영생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철학도 생물학도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명복제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차치하고서 생명복제의 근본적 목적은 지금 내 삶을 건강하게 연장하려는 목적이다. 생물학의 주요 연구분야인 세포의 죽음에 관한 학문도 노폐물이 쌓여서 죽는 세포의 메커니즘을 찾아서 노화와 질병에 대한 해결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다양성

그러나 세포를 통제하고 생명을 만들어서 원하는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영화 <가타카>처럼 유전자를 조작하여 우성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여도 모두가 우성이면 더럽고 힘든 일을 해야하는 사회의 하층 계급은 누가 맡겠는가. 인위적으로 하층 노예계급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DNA는 언제나 ‘발생학적 잡음’을 만들어 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표현형을 가진 개체를 생성한다.

르윈틴 교수는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의 형질을 조사했는데,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을 세어보니 (거 참, 힘들었겠다) 쌍둥이와 다름없는 초파리들도 늘 겨드랑이 털 개수가 달랐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똑같은 환경 하에서도 발생 과정에서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결과를 도출해 냄으로서 발생과정에는 늘 이런 잡음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것이 진화의 우연성이다.

실상 자연선택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 가장 강력한 메커니즘이다. (p 131) 그래서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Life will find a way)". 암컷만 만들어 놓은 주라기 공원에서도 스스로 염색체를 조절해서 번식을 완성하고 다양성을 만들어 간다. 생명은 늘 자유를 찾아간다. 

도대체 인간의 진화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지, DNA는 왜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 왔는지, 내 몸속에는 어떤 기억이 들어 있는 것인지 아직 해결 할 수는 없다. 생존과 번식이 유전자의 명령이라면 자살하는 인간과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에는 저항하는 뭔가가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에이씨 또 프로이트야. 했다가도 모든 것을 합리성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데 이르면 결국 버리지 못하고 집어 들게 된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두 분의 대담을 통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였다고 할까. 생물학자로서 인문학자들이 가져왔던 편견에 대해, 인문학자로서 생물학의 과학적이라는 오만에 대해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상대를 알기위해 던지는 질문들 속에서 분명히 교과서의 뒤에 붙은 연구학습마냥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두 분이 나눈 논의할 만한 주제들을 정리해 둔 페이지가 따로 준비되어 있으미, 그것을 뒤적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꺼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Purslane
Purslane/서재2007. 2. 21. 22:58

오랜만에 친구에게 책을 선물했다. 책을 선물하는 행위는 옷을 선물하는 행위만큼이나 무모한 짓이다. 사이즈가 같다고 주는대로 입게 되지 않듯이, 자신만이 아는 미묘함을 포착해내지 못한다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과 다름없다. 내 옷장위에 있는 4개의 박스 중 2개는 엄마가 사다준 옷들이다. 내가 사입는 옷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서 도통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이라 그렇게 몇년 빈둥빈둥 놀다가 재활용통에 들어가게될 것들이다.

하물며 엄마도 그러한데 가끔 책을 읽다가 이거라면 괜찮을 거라는 착각이 들어 덜컥 남의 손에 쥐어주는 짓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만큼 읽으면서 사랑스러웠노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저자인 앤 페디먼처럼 독서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냥 평범한 독자이다. 책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집안에 들어오면 책을 읽는 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냥 목록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흐뭇해진다.

책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애정을 가진 앤과 조지의 결혼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서재의 결혼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함께 산지 5년이 넘었고 아이도 태어났지만 감히 서재를 합치는 일을 하지 못했던 이 부부가 서재를 합치기로 하면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다.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사는 남편 조지는 3차원 물체들에게 전폭적 신뢰를 보내며 자신이 원하는 물건은 저절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이다. (알만하다.) 반면 앤은 그것들이 방랑자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늘 같은 자리에 놓아두는 사람이다.

서재를 결혼 시키는 첫번째 난관은 영국문학을 연대 순으로, 미국문학을 저자 이름순으로 정리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앤은 600여년의 영문학 책들은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문학의 흐름을 볼 수 있으나, 미국 문학을 시대순으로 꽂으려면 쪼잔하게 따져야한다는 논리이다.

내가 데굴데굴 굴렀던 대목은 여기다.
앤의 친구가 집을 비운 사이 한 실내 인테리어업자가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색깔과 크기순으로 재정리해놓았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실내 인테리어업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아무리 양보하고 양보해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몇몇 분들에게 서재를 결혼시키는 노하우를 물었는데, 대부분 '내' 책을 버리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같은 책이 두권 있더라도 (함께 살고 난후엔 이런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일단 내 책을 살리기 위해 꽤 필사적이었다. 나도 가끔은 동생 방에서 슬쩍 자기 책인양 꽂아놓은 내 책 찾기를 하고, 가끔은 나도 동생 책을 슬쩍 내 책들 사이에 꽂아둔다(우리는 거의 자진해서 돌려주는 일이 없다).

<서재 결혼시키기>는 습관적으로 교정을 보시는 어머니(는 신문을 읽다가 틀린 부분을 모아 놓은 것만 350건정도가 되고)나, 긴 단어를 와구와구 먹어치우는 오빠나, 음식점 메뉴판에서 틀린 단어를 찾아 계산할 때 메모를 남겨주시는 아버지와 함께 자란 앤 페디먼의 갖가지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거나, 무서운 독서광의 이야기라기 보단 책을 좋아하고, 책을 가지고 놀줄 알고, 책에 얽힌 추억을 가진 사랑스러운 에세이이다.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