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6.30 스페인의 우승
  2. 2007.09.12 Spanish Weekends #3 1
  3. 2007.08.31 안달루시아로 떠나다 2
  4. 2007.04.23 조금만 더, 조금만!
토끼머리2008. 6. 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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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을 몹시도 보고 싶었다. 2002년 그들과 우리가 월드컵 8강전에서 맞붙었을 때에는 어쩔 수없이 우리 팀을 응원했지만, 그들은 시종일관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이고도 결국 패배한다. 그게 세간에서 말하는 스페인의 '토너먼트 징크스'였고, 그들이 '영원한 우승 후보'라는 비아냥섞인 농담을 계속 감내해야 했던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이번 유로2008에서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선택은 옳았다. 라울-모리엔테스 라인을 뒤엎은 선택은 실력대로 선수를 선발하는 공정한 처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팀의 전체적인 경기력 향상에는 꽤나 기여했던 모양이었다. 스페인 대표팀의 수호 성인과도 같은 'San 이케르 카시야스'는 팀을 빛내주는 장식 역할에서 빠져나와 주장 완장을 찬 채 대표팀의 기둥으로 자리를 잡았고, 라울이 사라진 공백은 조직력과 젊음, 패기가 대신했다. 그렇다고, 비야와 토레스가 라울-모리엔테스 라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콘'을 버리고 실리를 챙긴 아라고네스의 뚝심은 확실히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묘하게도 내게 해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스페인에게 정서적으로 끌리는 나는, 그들의 더러운 인종주의 전통과 격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혐오하고, 어이없으리만치 강한 과거의 영화에 대한 동경, 급한 성질머리와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고개를 젓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건 내가 한국인이고, 그들이 스페인인이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공통점을 갖게 되는 '애증'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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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2007. 9. 12. 20:27
푸에르타 비에하. ‘오래된 문’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와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올린다. 이외에도 프랑스에서도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곳은 한두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이나, 독일이나 이탈리아도 와인 재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란 것 정도야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독 스페인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다. 스페인은 이들에게 와인의 나라라기보다는 투우와 플라멩고의 나라일 뿐이다.

하지만 오해다. 그라나다에서의 저녁식사. 우리는 알바이신과 알람브라 사이의 거리에서 빠에야와 와인을 주문했다. 스페인에는 리오하 강 유역이라는 훌륭한 와인 산지가 있다. 스페인 와인을 잘 모르니 추천을 부탁한다고 묻자 종업원은 “15유로(약 2만원)정도 하는 정말 좋은 와인이 있다”며 이 와인을 내왔다. 조금 미안하지만 이보다 더 높은 등급인 한국에서도 나름 유명한 스페인 와인 ‘마스 라 플라나’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관광지 레스토랑에서 그 가격이라니!

하루종일 더위와 미로같은 골목길에 시달려 짜증을 내기 직전이던 purslane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술의 신 바쿠스는 행복도 아마 함께 관장하는 게 아닐까.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8. 31. 00:38
출발 하루 전.

비행기표 시간도 모르고 환전도 하지 않았다. 짐은 당연히 못 쌌고 준비물 목록은 여기에 작성중.

세면도구, 옷가지, 카메라와 충전기, 블랙잭과 역시 충전기, 여권과 전자항공권 출력본, 그리고 각각의 사본, 비자와 마스타 신용카드 각 1장, 국제면허증과 국내면허증, 운전용 선글라스와 론리플래닛... 무엇보다 현금.

빼먹은 것은 없을까. 혼자라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준비물 목록은 언제나 단촐했다. 돈 신용카드 여권과 항공권 그리고 카메라와 충전기. 준비물 목록이 늘어난 것은 동반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떠나보는 혼자가 아닌 여행. 짊어지게 된 것은 많은 짐이지만 덜어낸 것은 외로움이다. 자유는 아마도 줄어들겠지만, 그 대신 가족이 생겼다. 한살씩 나이를 먹고 남처럼 늙어간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일상은 인생이 내게 선물하는 작고 지속적인 '경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안달루시아로 떠난다. 유럽 최고의 태양과 원색의 물결이 흘러 넘치는 곳으로. 감당할 만한 책임과 즐길 만큼의 부담을 안고, 분에 넘치는 행복과 값을 따질 수 없는 동반자를 곁에 둔 채로.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4. 2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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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레마두라는 스페인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건조하고, 더위가 멈추지 않으며, 추울 땐 가차없는 곳. 어원을 따져보면 EXTREMADURA라는 말 자체가 '지나치게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 이런 험악한 곳에서 성숙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코르테 레알은 엑스트레마두라와 상당히 닮아 있다. (사실은, 엑스트레마두라 산 와인이란 표시만 보고 별 생각없이 골라 들었다.) 밸런스가 무척 좋은데, 그것도 적당히 자리잡은 밸런스가 아니라 아주 강한 서로 다른 특징들이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만들어낸 밸런스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와인은 타협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지긋지긋한 전쟁 끝의 종전협정과 같다. 그렇다보니 딱히 흠을 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일관 느껴진다.

그런데도, 뭔가 아쉽다. 좋은 향과 부드러운 첫 느낌, 목을 넘길 때까지의 맛은 그랑크뤼 3~4등급 정도는 우스워 보일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뒷 맛이 씁쓸하고 시다. 덜 숙성된 것도, 산화가 된 것도 아닌 포도 자체의 신맛 같은데 몹시 거슬린다. 사실 거슬린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거슬리는 신맛은 아니다. 그래도 너무 완벽한 긴장이 한 순간에 깨어지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소매점 가격이 2만 원 대. 가격 대비로는 거의 최고급에 속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인데, 불행히도 마지막 뒤끝이 사람들의 인상을 구긴 모양이다. 별로 샵에서 인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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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노가 자랑하는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한국에서의 인기는 거의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이 20달러를 넘지 않으며(일반적으로 13~14$에 팔리는 듯) 국내 수입가격도 거품을 대충 제거하면 2만원대 초반(또는 2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

더구나 키안티 클라시코다. 저 욕심많고, 따지기 좋아하며, 혼자만 잘 되려고 하는 (한국인과 아주 흡사한) 이탈리아 포도 농부들이 싸우고 싸워 따낸 것이 키안티 '클라시코'다. 근처에 있다고 다 키안티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안동 반경 50km 이내에서 안동소주를 만든다고 그게 과연 진짜 안동소주겠느냐는 것과 같은 논리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클라시코'는 '원조'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_-;) 루피노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DOCG 2004. 이름으로도 기가 죽을 지경이다.

열어서 잔에 따르고는 강한 신맛을 느꼈다. 산지오베제가 원래 그렇지 뭐, 100%라는데...라고 넘기려고 했지만, 병을 열어둔지 1시간이 지나도록 신맛이 순해지질 않는다. 아니, 더 튄다. 2004년산이라고 참아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서 좀 거칠게 잔을 흔들어도 보고, 기다려도 봤다. 향과 입안에서의 느낌은 괜찮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맛이 튀느냔 말이다. 오히려 처음 코르크를 열고 30분 정도까지의 신 맛이 조화롭다고 느껴질 정도다. 좀 오래 열어뒀다고 해서 산화를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보니까, 이 와인의 수입원인 금양인터내셔널이 엄청나게 루피노 와인을 밀고 있는 모양이다.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가가 4만원대라고 해서 루피노의 키안티 클라시코 DOCG가 4만원 가치를 하진 못했으니까. 보관상태가 몹시 안 좋았던 것 같은 얼마전에 골랐던 트라피체 말벡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배에 담아서 대충 건너온다고 해도, 좀 더 신경을 쓰시지. 산지에서 농부나 양조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