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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5 토끼머리의 양대리스토리
토끼머리2007. 7. 5. 14:07

덕아웃스토리를 책으로 펴낸 양대리(왼쪽)와 1회 주인공이었던 LG트윈스 서용빈 코치

사람은 늘 친구를 존경하고 배우며 살아야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친구를 존경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또래로 같은 경험을 겪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친구란 대개 책 속에나 존재한다. 친구란 그저 서로 같이 늙어가고, 같이 신세한탄을 하며, 때로는 질투하는 대상 정도가 되는 게 흔한 일이다.

양대리를 만난 건 사회에 나와서. 처음 만났을 때 이 녀석은 대리도 아니었다. 그냥 사원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대뜸 같이 나이트클럽에 가자, 물 좋은 데 잘 안다, 이런 소리나 하는 거다. 또 대리가 빨리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있었다. 난 이 녀석을 출세 지향적인 인간으로만 생각했다. 돈 많이 벌 궁리, 빨리 승진할 궁리, 성공해서 남들 앞에서 보란듯 떵떵거릴 궁리만 하는 놈으로 봤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런 얘길 입밖에 내놓는 또래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또래 직장인들은 하나같이 패배주의자다. 속으로는 야심이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입으로는 그렇다. 이들은 모두가 로또로 한 몫 잡아서 일찍 은퇴할 생각이나 하고, 회사는 가늘고 길게 다니는 공기업이나 공무원 생활 등을 선호하면서도, 남이 잘 되는 걸 보면 배가 아파 견딜 줄을 모른다.

양대리는 만날수록 달랐다. 회사에서 튀고 싶어했고, 자기가 훌륭한 인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노력이 회사의 성과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다. 무사안일하게 하루하루 사는 대신, '사원 따위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큰소리치며 새로운 일들을 제안했고,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자기는 12시간 일하면서 남들 하는 일도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했다. 출세하고 싶다는 얘기를 끊임없이 떠들어댔기 때문에 자기가 뱉은 말이 부끄러워서라도 '책임질 수 있는 지위'에 올라가려고 노력했고, '가늘고 긴' 직장 따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남들이 잘 되면 자기도 그렇게 되려고 그 사람들을 찾아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질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그냥 좋은 샐러리맨일 뿐이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니 흔히 봐야 하는. 하지만 요즘 이런 샐러리맨은 없다. 가끔 이 녀석을 볼 때마다 난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과 같은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신화적 성공을 각인시키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아마 그들도 젊을 때 양대리같지 않았을까. 그래서, 친구지만 이 녀석이 존경스럽다.

뭐, 그렇다고 이 녀석이 신화적인 인물은 아니다. 자기자랑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녀석인지라,신문에 제 기사가 실리자마자 재깍 알려왔다. 그동안 열심히 선수들 꼬드기고, LG트윈스 프론트를 꼬드기고, 전광판 기사들에게 통닭 접대하며, 아나운서 언니들에게 알랑거려 만들어 낸 '덕아웃스토리'라는 만화가 조그만 만화책으로 출판된 거다. 첫 날, 잠실구장 매점에서만 100권을 팔았다고 자랑했다. 한 권에 2000원이니 겨우 20만 원 번 셈이지만, 이 녀석은 그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난 야구를 잘 모른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하지만 이 만화를 보면서 서용빈을 알게 됐고, 최길성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LG 선수들이 내가 아는 현역 프로야구선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TV에 야구중계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LG를 응원하게 됐다. 그건 모두 양대리 덕이다.

이 만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옆에서 지켜봤다. 내가 해준 거라곤, 좋은 생각이다, 열심히 해라, 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지만, 막막했던 일을 이 녀석은 하나씩 현실로 해나갔다. 제일 중요한 건 만화가였다. 양대리는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릴 줄은 더더욱 모른다. 오로지 선수들과 부대끼며 쌓인 '이야기'가 이 녀석의 전 재산이었다. 그래서 만화가를 찾아갔더니 찬밥취급만 당했다. "네가 만화 시나리오가 뭔지나 알아?"라는 조소부터, "쓰려면 편 당 100만 원은 줘야지"라는 콧대형까지 유형도 다양했다. 예산은 없었다. 편 당 100만 원 씩 '대리의 꿈'에 쏟아부어줄 회사는 LG스포츠가 아니라 어디라도 없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공주대 만화창작학과. 그곳 지도교수를 만나고 돌아와서 양대리는 또 자랑 보따리를 쏟아놨다. "아, 내가 돈이 없잖아.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수님께 '돈은 못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교수님과 제가 산학협동의 훌륭한 성과물을 하나 만들어 보시죠'라고 말씀드렸지. 다행히 고개 끄덕여 주시더라. 생각해 봐, 이 만화 대박나면 정말 그 학생들에게도 산학협동의 모범사례가 되고, 이익도 돌아간다고."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만화를 처음 시작하면서 대박날 꿈만 꾸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결국 만화는 성공했다. 학생들에게도 좋은 커리어가 됐을 것 같다.

어찌어찌 만화가는 구했는데, 그 다음은 전광판이 문제였다. 홈페이지에서만 보여주는 건 이 녀석 성에 차지 않았던 거다. 프론트를 찾아가 빌고 설득하고 조른 끝에 홈경기에서는 5회가 끝나고 구장 정리 타임에 이 만화를 틀기로 했다. 문제는 전광판 기사님들. 양대리가 "음악과 싱크로가 잘 맞아야 해요. 이거 제가 사인 보내면 정확히 트셔야 합니다." 등등의 까다로운 주문을 해대니 갑자기 일거리가 늘어난 분들이 맘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양대리는 통닭과 콜라를 사들고 홈경기 전날 전광판 기사들을 찾아가, 예행연습까지 하고야 말았다. 아나운서들도 찾아가 마지막 멘트를 감동적으로 읽어달라고 수없이 부탁했다.

별 일들이 많았다. 이 녀석은 뭔가 뒤틀릴 때마다 소주나 하자고 날 불러내 놓고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왜 이리 안티는 생기고, 고까워하는 사람은 많고, 신경쓸 것 많아서 그만 그리련다"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별 얘기도 안 하고 술만 마시고 있으면, 혼자 알아서 "그래도 재밌지? 팬들이 찾던데, 계속 해야겠지?" 이러는 거다. 여기서 한두 마디만 맞장구쳐주면 술기운도 올랐겠다, 기분도 좋아졌겠다, 다시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헤어지곤 했다. 그리고 만화는 계속 올라왔다.

세상은 긍정적인 양(+)의 에너지와 부정적인 음(-)의 에너지가 조화를 이뤄 구성돼 있다. 양대리는 -100~+100까지로 구분되는 이 세상의 에너지원들 가운데 +90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슈퍼 전지다. 수많은 - 전지들 때문에 세상이 짜증나는 사람들에게 양대리는 +의 에너지를 선물한다. 친구를 존경한다는 기분을 가끔씩 느낄 수 있다는 건, 내 인생에도 축복이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