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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8. 2. 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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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를 호되게 치뤘다. 기억하는한 이렇게 오래 아파본 적이 없다.

목요일 저녁쯤 감기기운이 느껴져 으슬으슬한 몸으로 일찍 침대에 누워 자다보니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차갑던 손발이 더 시려워서 자다말로 양말을 꺼내 신고 다시 누웠다. 새벽녘엔 거의 움직일수도 없어서 회사에 전화를 하고 종합감기약을 먹었다.

오전을 집에서 보내게 됐다고 생각하니 휴가를 얻은 기분이되어 잠시 일탈의 기쁨도 만끽했다. 비록 밀린 일을 처리하거나 나가서 놀 수는 없었지만 대신 밀린 책을 꺼내 읽다가 잠이 들었다. 감기약 때문인지 꼬박 5시간을 넘게 자다가 오후 6시쯤에야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둑하고 이렇게 앓다가 하루가 갔구나 싶었다.

그제서야 하루종일 씻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면서 오늘 저녁은 뭘 준비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갈 수가 없으니 있는 걸로 해결해야할텐데 걱정하다가도 한편으로 몸이 무거우니 귀찮기도 했다.
씻고 나오니 신랑이 아픈 나를 두고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게 미안한지 연락이 왔다. 서운한 마음보단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나도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좀더 쉬어야겠다 싶었다.

감기에 걸린 첫날 내 컨디션은 그중 가장 나은 축에 속했다. 침대에서만 보내는 동안 2권의 소설책을 읽었다.
다음날 몸살이 더 심해져서 병원에 가야했고, 지어온 3일치 약을 다 먹기도 전에 다시 병원에 가야했다. 처음엔 미열이었던 것이 39도를 육박하면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밤이 되어 잠만 자면 열이 더 높아지니 잠들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결국 4일째 되는 날 아침엔 울먹거리며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놀라서 감기에 좋다는 생강과 과일, 음식을 잔뜩 싸서는 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엄마가 오실 때까지 두어시간을 꿈뻑거리며 시계의 분침만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아침식사를 차려주셨지만 열이 높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뜨는둥 마는둥 시늉만 하고 병원에 같이 갔다. 거의 한시간을 대기하면서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식은땀이 나서 앉아있는것도 힘겨웠다. 그래도 혼자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땀을 흘리며 푹 잤다. 두어시간 동안 주방에서 엄마가 뚝딱뚝딱 이것저것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평생 듣던 소리인데도 처음 듣는 생소한 소리처럼 느껴졌다. 조미료가 어디있는지, 야채가 어디있는지는 잘 찾으실까.따위의 걱정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점심이 지나서 일어나니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며 저녁거리까지 잔뜩 만들어 놓고는 점심을 먹고 얼른 가셔야 한단다. 언제 이런건 다 준비했을까 싶었다. 둘이 앉아서 점심을 먹고, 뒷정리는 제발 그냥 두고 가라고 실갱이를 좀 하다가 배웅을 했다.

이것저것 챙겨드리고 싶은데, 약속장소가는데 번거로우실까 싶어 그냥 다음주에 다시 보자고 하며 가는 길을 알려드렸다. 엄마가 가고 주방 불을 끄고는 침대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남들은 결혼하면 엄마가 보고싶어서 한번씩 울곤 한다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신랑이 농담처럼 엄마 보고싶지 않냐고 물어도 엄마가 알면 서운할 정도로 딱히 보고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그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누가 다녀간 빈자리가 그렇게 순식간에 크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더니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