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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1 배신자가 된 터미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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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는 모두가 '쇼'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터미네이터'가 공화당 간판을 달고 2003년 민주당의 텃밭인 캘리포니아에서 정치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민주당의 위기와 캘리포니아의 자유주의 전통의 위기에 몸서리를 쳤다. 캘리포니아는 '기회의 땅 미국'의 상징과 같았다.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고, 쓸데없는 권위와 허례허식을 경멸하는 그 전통 말이다. 물론 아놀드는 이민자였고, 평등한 기회를 이용해 미국 사회 주류로 진입한 인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그의 막대한 재산과 어눌한 액센트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집권하자마자 친환경정책을 들고 나왔다. 역시 비웃음을 사기 딱 좋았다. 정치적 '쇼'로만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2004년에는 GM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비효율적이고 반환경적인 자동차'로 꼽히는 '허머 H2'(미군용 '험비' 트럭의 민간버전)를 수소자동차로 개량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남성적인 차를 타도 충분히 친환경적일 수 있다"면서. 영화배우 아놀드가 만들어낸 이벤트, 그때만 해도 그들은 그렇게 '터미네이터식 정치'를 비판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2020년까지 25% 이상 의무적으로 감축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터미네이터는 이를 귓등으로 흘려 듣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고, 대신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기후변화 관련 정책 협의에 협력하기로 손을 잡았다. 그에게는 이념이란 게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화당원들은 배신감마저 느껴야 했다.

환경 정책 이외에서도 이런 점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하는 공화당원인 동시에,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보건복지 예산에 주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공화당원이다. 이는 모두 전통적인 민주당의 가치들이다. "난 공화당을 대표해 주지사가 된 것이 아니다. 난 나를 뽑아준 유권자를 대표해 주지사가 됐다." 이런 말을 일삼는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의 골칫거리다. 하지만 동시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겐 축복이다. 미래에서 날아와 존 코너를 지켜주는 터미네이터처럼, 아놀드의 행보는 동시대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그는 '민주당의 텃밭'에서 지난해 재선에 성공했다.

"더 많은 차를 만들고, 더 많이 차를 타도 좋다. 다만 친환경차를 타고, 기업은 연료효율적인 차를 만들어야 한다."

아놀드의 환경정책 이념에는 사실 문제가 좀 있다. 기술 발전에 대한 그의 맹신에 가까운, 어쩌면 표를 의식한 듯한 신념은 앨 고어같은 사람들의 '적게 쓰고 덜 편리하게 사는' 환경정책 이념과는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아놀드보다는 앨 고어의 정책이 사실 더 친환경적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앨 고어의 환경다큐멘터리 영화)은 정말 불편하다. 정통 민주당원의 눈에 아놀드는 그저 무임승차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와이어드 매거진은 '2007 Rave Award' 수상자로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뽑았다. 말 그대로, 미국인들은 지금 터미네이터의 쇼에 열광(rave)하고 있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