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유혹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필요했다. 즉 내가 남자에게 개방적인 여자라는 것과 아무에게나 개방적이지는 않다는 것. 나는 여러 남자친구 얘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아 내가 부담 없는 상대임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진정 이해 받을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냄으로써 허점을 보이고 곁을 내놓는 한편 간간이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도덕적 규범에 대해 탄식하기도 했다. 현석이 자세를 바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를 유혹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예요' 하는 암시이다. 지적인 남자는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당연하고 옳은 말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함 말만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반드시 칭찬을 하되 상투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논리에 어긋나도 상관없다. 남과 달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가 너무나 많이 들었을 용모에 대한 호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오직 지성에 대한 감탄만을 늘어놓은 것은 내가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이었다. 물려받은 아름다운 용모는 기정 사실이라 치고, 제 스스로 도달한 지성에 대해 더 많은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은 지적인 남자의 당연한 허영심이었다. 여러 가지 인문적 교양을 동원하여 그의 고상한 화제에 성심껏 응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언제쯤 취해버린 척하며 그로부터 남자로서의 행동을 유발할 수 있을까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를 유혹하는 세 번째 단계는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하는 자기 암시이다. 그 암시를 스스로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려면 손을 잡는다거나 포옹한다거나 하는 가시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날은 윤선, 경애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혼자 그 술집에 들어와 있다가 현석을 만난 것이다. 경애에게 못 간다는 전화를 걸러 갈 때만 빼고 나는 드물게도 오로지 현석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만으로 유혹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보여 곁에 오게 한 다음 특별한 호감을 표시함으로써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러고는 행동의 증표를 남기게 하는 것, 이런 따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유혹의 방법이다. 그것이 결정적 기회인가 한갓 해프닝인가는 오로지 행운이 결정한다. 술집 계단에서 나는 걸음이 비틀거려 두 번이나 난간을 붙잡았다. 그는 예상대로 약간 망설이다가 내 어깨를 안았다. "내 팔 잡아요." 그러나 나는 짐짓 그의 팔을 풀며 "괜찮아요. 별로 안 취했어요" 하면서 불안한 몸짓으로 다시 난간을 더듬어 잡았다. 그러고는 그가 머쓱해져서 방심하고 있을 때 계단 중간쯤에서 재빨리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의 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기화로 나는 적절한 때 행동을 끊고 다시 앞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내 앞에 택시가 한 대 와서 멎었다. 나는 지체 없이 택시를 향해 다가갔다. 뒤따라온 현석이 내 팔을 붙잡았다. 뜻밖에도 손아귀 힘이 세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기의 순간적인 과격함을 변명하듯이 순순히 팔을 놓으며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붙잡았다는듯이 "조심해 가세요" 하고 인사치레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며 쏘는 듯한 눈빛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그가 내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택시가 그냥 출발하려 했으므로 급히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춘 것은 '오늘 밤'이라는 긴 문장에 찍은 마침부호이다. 나는 알쏭달쏭한 말없음표나 물음표, 평이한 마침표가 아닌 강력하고 짧은 느낌표를 찍은 것이다. 마침부호는 다음 문장의 향방을 결정짓는 강력한 표현이 되기도 한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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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옛 파일을 정리하던 중 '비망록'이라고 적어놓은 hwp 파일이 눈에 띄었다. 과연, 내 별로 대단할 것 없고, 심지어 길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삶에 '잊지 말아야 할 기록'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 기록들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놓은 단상들 가운데 대부분은 길지 않은 인용이지만, 굳이 이 은희경의 소설책 한 귀퉁이를 그대로 받아쳐넣은 긴 인용부터 옮겨 적기 시작한 것은 이 부분이 내 머릿속 한 부분을 점화시켰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시동키를 돌려 스타트모터가 돌아가고, 엔진의 점화플러그에 불꽃이 튀며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행정이 시작되는 그 느낌. 머릿속 잠자고 있던 두뇌의 한 부분이 시동을 걸고 먼지를 털며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은희경의 글을 읽고 있자면, 수줍어진다. 얼굴이 약간 발그레해지기도 하고. 그녀의 글은 읽어야만 하도록 만드는 의무감을 자아낸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