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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8 4월 8일, 파블로 피카소와 커트 코베인
토끼머리2007. 4. 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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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hn Marck

1973년 4월 8일, 파블로 피카소가 죽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허름한 카페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돈이 없어서 그려놓은 작품을 불에 태워 난방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허름한 카페 'Els 4 Gats'는 지금 람블라스 거리의 관광명소가 됐고, 그의 작품은 현재 수천만 달러에도 거래가 된다.

그는 생전에 프랑스 공산당의 충성스러운 당원이었지만, 가장 부유한 화가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고, 게르니카 지방에 떨어진 폭탄의 참상은 강렬한 그림으로 그려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고향인 카탈루니아의 민족 문제에는 별로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랑이 예술혼의 원천이라면서 3명의 부인에게서 4명의 자녀를 뒀고, 말년까지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몹시도 유명세를 탔다. 그의 고생은 젊어서 잠시. 이후에는 한 번 얻은 유명세로 말년까지 풍요로운 삶을 보낸다. 그의 유명세의 원천은 아마도 그와 교류했던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파리 시절 만났던 앙드레 브레통, 기욤 아폴리네르, 거르투르드 스타인, 장 콕토까지.

그의 죽음도 그랬다. 아내와 함께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던 그는, "나를 위해 잔을 들게, 나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들게. 나는 더 이상 잔을 들지 못한다네"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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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1년 뒤 4월 8일. 이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시애틀, '워싱턴 호수' 옆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샷건의 방아쇠를 당긴 채로.

그는 어린 시절 비틀즈의 노래를 멋드러지게 불러 인기를 끌었던 아이였지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로는 수많은 위태로운 청소년 가운데 하나로 자란다. 운동은 하기 싫어했고,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썼으며, 게이 친구들과 친하게 어울렸던 탓에 '호모'라며 손가락질을 당하곤 했다.

코베인은 한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었고, 그의 주위에는 늘 인디 음악계의 음울한 친구들만이 가득했다. 잘 나가는 밴드라고 볼 수도 있었고, 인기도 꽤 있는 편이라 애인도 여럿 있었지만, 그래봐야 활동무대는 시골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단 한 명. 아내 커트니 러브 뿐이었다.

메이저 레코드사인 게펜에서 음반을 내면서 그는 갑자기 주류가 됐다. 음울하고, 이상하고, 어딘가 불량스럽고 반항적인 이 젊은이는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스타가 됐고, '비틀즈를 흉내낸 곡에 내가 쓴 시를 붙였을 뿐'이라고 말했던 노래들은 세계적으로 수천만장이 팔려나갔다. 결국 그는 모든 걸 견디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