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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6 평양면옥 1
토끼머리2007. 10. 6. 00:52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크곤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이북분이셨다. 고향은 평안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외식을 가곤 했던 어린 시절, 우리는 곧잘 냉면집에 가곤 했다. 그것이 평양냉면과의 만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을 가득 채워주던 냉면을 한 그릇 비우고는 국물까지 싹싹 마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8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냉면을 혼자 한 그릇을 먹는다"며 어린 손자를 칭찬하곤 하셨다.

장충동 평양면옥은 수많은 평양냉면 집 가운데서도 냉면맛이 꽤 정석적인 유명한 식당이다. 그렇다보니, 늘 손님이 줄을 선다. 이 곳에선 손님 대접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다. 조선족으로 여겨지는 투박한 이북 억양의 아주머니들은 손님이 불러도 대답도 잘 하지 않기 일쑤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 집 단골이 된 게 15년 째다. 맛있으니까, 좀 대접이 소홀해도 참을 수 있었다. 냉면값을 올려 받아도 참을 수 있었고, 발레파킹 비용을 따로 받기 시작했어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땐 처음으로 뛰쳐나오고 싶어졌다. 식당 한가운데에 앉았더니 에어컨 바람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손님은 좀 많았지만, 에어컨 바람을 온몸에 쐬고 있을만큼 더운 날씨는 아니라, 일어나서 에어컨 방향을 위로 돌렸다. 순간,

"아저씨! 그거 만지지 마요!"

설마 나를?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나였다. 주인 아저씨의 친척으로 보이는(15년을 다니다보니 단순 종업원과 붙박이로 나오는 분들은 구분이 된다.) 험상궂은 아저씨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바람이 정면으로 와서요." 뭔가 잘못한 듯 대답해야만 했다. "아, 정말!" 이 아저씨는 화를 내더니 내가 돌려놓은 에어컨 날개를 다시 내 정면으로 고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바람이 싫으면 자리를 비켜 앉던가!"라며 무안을 주는 것이다. 일어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냉면이 정말 먹고 싶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래, 옮겨 앉으라면 옮겨 앉아야지. 이번에는 종업원 아주머니가 화를 냈다. "아니, 테이블을 바꿔 앚으면 어떻게 해요. 주문은 테이블 번호대로 들어가는데!" 울어야 하는 걸까,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처음이었다. 이 가게에서 불평을 쏟아낸 것은.

그래도, 난 계속 평양면옥에 간다. 또 가고, 또 간다. 지난 주말에도 갔고, 이번 주말에도 갈지 모른다. 젠장, 이정도면 중독이고, 이 음식은 아마도 마약류에 속하는 게 아닐까. 이제까지 이집에서 팔아준 음식값을 모으면 적어도 쏘나타 한 대는 살텐데. 이 가게에서는 걸쭉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할아버지들의 호통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주로 "냉면 맛이 변했어! 이거이 예전 그 맛이 아냐!" 식이다. 하지만, 걸작은 지난번 사람이 무진장 많았던 날 만났던 한 할아버지였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이 맛도 없는 냉면집에 왜 이리 많이 몰려오는거야!"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단골이시잖아요. 아, 이, 맛이 갈대로 가버린 냉면중독자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