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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09 검투사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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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는 검투사와 같다. 지면 죽는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삼성증권 사장 시절, 스스로를 향해 다짐한 말이었다. 정말 지면 죽을 각오로 일을 해야했다. 그는 관행과 싸웠고, 조직 내부의 저항과 싸웠다. 악바리처럼 싸워댔다. 주위에 친구보다는 적이 많이 생겨났다고 해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다. 그가 삼성증권을 떠나 우리금융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삼성증권 사람들 일부는 떠나는 그의 뒤에 대고 아쉬움의 눈물 대신 조소를 보냈다. "나 같으면 삼성증권 사장을 하겠다. 밀려나서 저기로 가는 것 아니냐"라면서. 하지만, 그는 삼성증권을 많이 바꿨고, 성과도 나름대로 올렸다. 무엇보다 황영기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다. 두려움의 대명사로.

그래서 우리금융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우리은행 행장을 겸임하면서 일선 지점장들에게 속에 칼이 담긴 지휘봉을 선물로 보냈을 때, 지점장들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올해 실적이 안 나오면 날 잘라버리겠다는 뜻이로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황영기 체제의 우리은행과 우리금융그룹은 많이 변해야 했다. 복지부동하는 직원들에게는 거침없는 경고가 날아갔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는 직원들은 어김없이 회장에게서 직접 격려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있을 때 주창했던 '토종은행'론은 경영학 교과서에 CEO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인용될 법한 일이었다. 은행간 경쟁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던 한국 은행판에서 그는 외국계 주주 비율이 50%를 넘는 다른 거대은행들을 싸잡아 비판하며 한국의 은행은 우리은행 뿐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은행들은 발끈했지만, 이에 발끈해 대응할수록 '황영기 페이스'에 말려들어 우리은행을 띄워줄 뿐이었다. 그는 정부가 대주주라는 우리은행의 태생적 약점을 최고의 장점으로 양질전환시켜냈다. 세 치 혀 만으로.

그의 세 치 혀는 이곳저곳에 논란과 분쟁을 일으켰다. 그가 M&A를 언급하면 금융시장 전체가 뒤흔들렸고, 그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나서자 재계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심지어 정부마저도 그의 독설에서 피해나가지 못했다. 황 회장은 우리금융그룹의 자유로운 성장전략을 통제하는 대주주(정부)의 간섭이 부당하다고 떠들어댄 것이다.

황의 임기가 끝나가자 모두들 과연 황이 어떤 카드를 보일지 궁금해했다. 주주가 싫어하는 CEO가 회사에 남아있을 가능성이란 사실상 제로(0)에 가깝다. 하지만 왠지 황은 다를 것 같았다. 칼보다도, 펜보다도 강했던 그의 세치 혀가 이번에는 어떤 마술을 부릴까 사람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황의 입은 독설 대신 자탄을 쏟아냈다. "대주주가 황이 떠드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는데 어쩌겠느냐."

재경부 제1차관이었던 박병원 차관이 우리금융 회장 자리에 지원했을 때였다. 정부 고위관료가 일개 금융회사 회장으로 내려오겠다며 차관 자리를 박차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이미 정부가 박 차관을 차기 회장으로 내정했다는 사인이었다. 회장 공모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금융권에서는 우리금융의 황금기는 이제 끝났다며 수군거렸고, 소액투자자들은 지분을 팔아치웠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황영기의 우리금융'이었지 '관치 우리금융'이 아니었으니까.

황과 만나 인터뷰를 하던 때 사진기자가 찍었던 저 사진은, 슬픈 듯한 황의 표정을 나타내는 몇 안 되는 보도사진이다. 그만큼 황은 언제 어디서 어떤 앵글로 사진에 찍히든지 관계없이 늘 당당해 보였다. 모두가 그의 한 마디에 주목했고, 그는 은행가 답지않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람들의 귓속에 메시지를 불어 넣었다. 하지만, 오늘 난 갑자기 슬픈 듯한 황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고 그래서 굳이 저 사진을 뒤적여 찾아냈다.

'님의 침묵'을 인용하며 마지막 월례조회를 하던 그의 모습 때문일 테다. 기룬 것은 다 님이라는 만해의 싯구를 인용해, 그는 자신에게 기룬 것이, 자신의 '님'이 바로 우리은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우리금융을 떠나게 됐다. 물론 그는 앞으로 무슨무슨 회사의 사장이 될 수도 있고, 무슨무슨 회사의 고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자산규모 국내 2위였던 금융그룹의 우두머리가 고만고만한 회사 CEO로 내려갈 수도 없는 일이고, 친정인 삼성그룹에도 황의 자리는 없을 것 같다. 과연 그가 향할 곳은 어디일까?

우리은행은 황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은행이 '관료의 것'이라고 봐도 좋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은행은 국민의 혈세를 쏟아부어 살린 은행이지, 관료의 재산을 쏟아부어 살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당신들의 눈에는 민간의 은행이란 곳이 재경부 차관이 어느 날 휙 내려가 경영을 맡을 정도로 만만한 곳으로 보였던 것일까? 아니다. 두 눈 똑바로 치켜뜨고 감시해줄 테다. 과연 황을 쫓아낸 당신들이 얼마나 우리은행을 살려 놓을지, 얼마나 국민의 피같은 세금을 회수해 국고에 돌려 놓을지 말이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