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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1 [블러디선데이]그 피의 일요일을 기억하라
  2. 2007.02.21 The Soul of a Man
Purslane/극장대기실2007. 2. 21. 23:43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을 향해 그들의 주권을 주장해 왔다. 블러디 선데이는 1972년 1월 30일에 있었던 그들의 평화행진이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북아일랜드의 독립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들은 왜 1972년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큐적 기법을 통해 단지 당신을 그날에 뚝 떨어뜨려 놓는다. 거리를 걸으며 평화적 시위를 하려는 북아일랜드 데리시의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군대에게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아무도 시위대에게서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어딘선가 들린 총성 한발에 14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하고 13명이 사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광주를 떠올렸다. 아쉽게도 나는 광주를 잘 알지 못하는 세대이다. (그것이 회피할수 있는 핑계는 아니지만) 김영진기자는 광주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지식인뿐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을 치르며 시끌벅적하게 눈과 귀를 가리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광주를 외면해왔다. 아직도 광주는 커다란 역사속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박하사탕>,「꽃잎>과 같은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일부로 투영될 뿐이었다.

우리가 아직 광주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린그래스 감독을 비롯한 아일랜드 작가들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 많은 영화를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 짐 세리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나 <더 복서>, 닐 조단의 <마이클 콜린스>등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으며, 은폐된 사실을 규명하고 지나간 역사를 자꾸만 현실로 끌어당김으로서 아일랜드의 영화들은 전세계에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헐리우드는 아랍인들만큼이나 한때 IRA를 테러리스트로 자주 등장시켰지만 아일랜드 감독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듦으로서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역사속에 허구적 설정을 버무려 놓으면서 그 속에 개인사를, 단순히 멋진 배우를, 신파를 넣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흔히 이런 형식의 영화는 재미없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설명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을 놓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강한 힘을 지녔다. 그것이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객관성, 정확성등이 진리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권력에 쉽게 무력화된다. 다큐멘터리도 결국은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잊게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린그래스 감독이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한것은 매우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에서 세련된 카메라 워크나 근사한 화면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핸드핼드로 사람들을 쫒아다니고, 적당히 잡음이 섞이고, 조악한 화면을 보여주면 더 사실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화면과 화면사이를 암전으로 처리하거나 마지막장면까지 끊임없이 여기저기에서 울려대는 전화벨소리는 더욱 영화를 real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분명히 카메라는 한편에 서 있다. 정작 총격이 시작되면 무력한 시민들은 도망다니고, 흰 수건을 흔들며 쭈그리고 뛰어다니지만 무장한 군인들은 정확히 무엇을 겨누는지도 모르는채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죽인다. 총격이 끝나고 시민들은 병원에서 죽은 형제, 부모를 찾아서 눈물을 흘리고 분노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시민들에게서 총한자루도 찾지 못한채 그것이 정당한 행위였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인 행위였다고자신있게 말한다. 위증을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관객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국군의 지나친 무력행사와 사건은폐는 침묵 시위를 하던 데리의 수많은 청년들에게 IRA에 가입해 총을 쥐어주는 역할을 했다. 세계권력의 주류인 영국을 용기있게 직접적으로 비판하므로서 아일랜드는 소정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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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Sunday

나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지 못했다. 자그마치 천만이나 되는 관객이 그 영화를 보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는 하는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잘생긴 두 배우와 신파적인 설정, 여성으로서 이은주의 역할에 대한 비난따위가 전부였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최근까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영화가 나왔지만 현실을 던져주는 영화는 없었다. 언젠가는 극장에서 우리도 신파가 아닌 역사의 한장면을 보게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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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Sunday / 2002 / Directed by Paul Greengrass

Posted by Purslane
Purslane/극장대기실2007. 2. 2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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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다시 돌아온 빔벤더스 감독. 이번엔 Blues다. 그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극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머나먼 저 우주 끝 어딘가까지 전달될 블루스의 향연. 좀 생소하지만 전설적인 블루스의 거장 Skip James와 J. B. Lenoir의 음악이 재탄생되는 장면을 두시간동안 지켜보았다. 그 블루스의 아름다움은 말해 무엇하랴.

백인들은 Jazz Age를 맞이하고 술로 흥청대던 Lost Generation들로 혼돈스럽던 미국의 1920년대에 흑인들은 조용히 노래를 읖조리고 있었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계속 되는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스스로의 모습을 유례가 없을만큼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에게 음악만큼은 백인이 흑인을 넘어설수 없는 분야이다.

블루스는 블루스를 가져야만 표현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노예제를 통과한 미국 흑인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블루스에는 우리가 '한'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먹을것도 없이, 집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이끌고 길거리에서 고통스러운 외침을 뱃어내는 제2의 제3의 말콤엑스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창백한 옷을 입은 유령같은 KKK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흑인들의 일부나마 이해하고 싶어진다.

미국의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건너와서 해방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흑백갈등, 인권, 법적차별등을 겪었다. 최근에 와서야 이런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면서 흑인내부의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제 자기치료와 그동안의 수많은 경험들은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가 그들의 문제이다.

Skip James도 J. B. Lenoir도 이미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큰 획을 그엇는지, 얼마나 많은 뮤지션들이 그들의 음악에서 블루스의 정수를 느끼는지 모르고 사라졌지만 우주 저멀리 어디선가 듣고 있겠지. 보이저호도 도착하지 못한 그곳에서.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