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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달의 우승에 감탄하면서도, 페더러에 대한 연민에 억울함과 아쉬움을 느꼈는데,

이 기사의 제목만 보고도 단번에 나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좋은 제목의 힘이다.

"웅대한 전투 속에서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리다."

나달에게 페더러 정도의 멘탈리티만 갖춰진다면, 아마도 이제 앞으로 3~4년 동안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페더러에게 나달이라는 좋은 경쟁자가 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젠 나달에게 '페더러라는 좋은 경쟁자'가 존재하는 셈이니 나태해질 일도 없을 테고.

도무지 호주 오픈 말고는 시간이 맞아서 볼 수 있는 시합이 없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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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게 뒤지고 있던 송가를 응원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나는, 조코비치의 다리가 풀리자 환호성을 질렀다. "몰아붙여. 기회야!"라고 외치며. 4세트, 체력이 소진됐을만도 한 때였다. 조코비치는 호주오픈 들어서 늘 3:0 완승만을 거둬왔고, 4세트까지 시합을 이어온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송가는, 체력이 바닥나도 정신력만으로라도 뛸 만 했다. 말 그대로 이 순간이 송가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일 것임에 분명했다.

4세트, 그 4세트에서, 내가 응원하던 송가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조코비치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친 바로 그 순간에서, 난 아마도 진짜 테니스를 느낀 것 같다. 쓰러져가는 조코비치는 송가의 서비스가 조금만 날카롭게 들어오면 팔조차 뻗지를 못했다. 송가가 랠리를 길게 이어가려고 하면, 아예 포기해 버렸다. 조코비치는 절반을 버리고, 자신의 서비스 게임에만 모든 것을 걸었다. 190km가 넘는 서브는 마지막 타이브레이크의 순간까지 계속해서 쏟아졌다.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 분명할 만큼 수건으로 땀을 연신 닦아내면서, 끊임없이 왼쪽 허벅지를 왼 손으로 마사지해가면서, 조코비치는 거기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지켜냈다. 이 때 조코비치가 사용한 가장 큰 무기는 송가로부터 계속해서 얻어 맞았던, 송가의 전매특허 '드롭샷'이었다.

송가도 멈춰 서있지 않았다. 랭킹 3위에, '황제' 페더러를 꺾고 한창 상승세를 타는 이 노련한 신예에게 있는 힘껏 맞섰다. 200km가 넘는 서비스 에이스를 연속으로 꽂아 넣고, 슬램덩크 같은 오버헤드 스매시로 조코비치를 위협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송가의 가장 큰 무기는 그때까지 조코비치로부터 계속해서 얻어 맞았던, 조코비치의 전매특허 '다운더라인'이란 사실이었다.

송가가 패배한 건, 경험부족에서 나온 상대적으로 부족한 정신력 탓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조코비치가 졌다면(타이브레이크를 놓쳤다면 십중팔구 그렇게 됐겠지만), 그것은 송가 만큼 버틸 수 없었던 상대적으로 부족한 체력 탓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 초반의 두 젊은 선수는, 경기 내내 발전하면서, 마지막까지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면서, 상대의 장점을 배워나갔다. 어떻게 이렇게 드라마 같은 경기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걸까. 송가와 조코비치의 대결은 재미없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나의 편견은 여지없이 틀렸다. 오늘의 호주오픈 결승은 단연 최고의 경기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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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가 골프를 재미없게 만든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테니스도 그럴 뻔 했다. 페더러와 나달이 맞붙는 결승을 수 차례씩 보아오면서 이젠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하드 코트와 클레이 코트를 구분하면서 우열을 나눠 보는 것도 한 두번, 이젠 할만큼 했다.

그 때 송가(혹은 총가)가 나타났다.(송가로 표기하는 것이 대세인 듯 싶어 앞으로는 송가로 통일) 랭킹 상위권의 시드 선수들을 줄줄이 꺾으며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결승까지 진출했다. 게다가 준결승 상대는 세계 2위 라파엘 나달이었다. 그것도 기존에 약했던 하드 코트에서 최근 물이 오를대로 올라서 '황제' 페더러를 꺾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고 한 바로 이 호주 오픈에서.

아래의 통계를 보면 송가의 승리의 비결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랭킹도, 역대 거둬들인 상금 총액도 나달에게 밀리는 것은 기본이다. 경력에서 일단 송가는 나달의 적수가 아니다. 더욱이 ATP에서 결승에 오른 첫 시합이 그랜드 슬램일 정도로, 송가의 경력은 일천하다. 경기 내용도 마찬가지. 둘 다 화끈한 시합을 자랑하긴 하지만, 나달은 호주 오픈 본선에서 3:0 아니면 2:0의 파워풀한 스트레이트로 4강까지 바로 올라왔다. 단 한 세트도 상대방에게 내준 적이 없었다.

차이는 서비스였다. 쿼터파이널까지 68개를 쏟아 넣은 송가의 서비스 에이스는 페더러와 공동 선두였다. 나달과의 시합에서도 서비스 에이스는 쏟아졌다. 나달과의 4강전에서 쏟아낸 에이스만 17개였다. 최고 속도는 221km. 개인 기록은 231km까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로딕과 같은 스피드에 페더러같은 영리함까지 갖춘 모양이다. 최고다.) 이 시합 이후 송가의 에이스는 85개가 됐다. 더욱이, 베이스라이너인 나달에게 송가는 위력적인 서브&발리로 정면으로 맞섰다. 나달이 아무리 스트로크를 깊이 찔러대도, 송가는 기필코 네트까지 전진해내고야 말았다. 그 위압감과, 예상을 뒤엎고 떨어지는 드롭샷에 나달은 시종일관 괴로워했다.

송가가 꼭 페더러하고 한 판 붙었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조코비치, 이번엔 아닌 것 같다. 프랑스라면 늘 눈을 흘기지만, 송가에게만은 예외다. 이 프랑스 특급열차가 너무 멋지다.

송가와 나달 비교(전적은 호주오픈 4강까지)

 

송가

나달

1.88m

1.85m

몸무게

90kg

86kg

나이

22세

21

랭킹

38위

2위

스타일

오른손 포핸드, 투핸드 백핸드

왼손 포핸드,투핸드 백핸드

에이스(호주 오픈)

68

28

더블 폴트

10

12

5세트까지 간 경기

0

0

4세트까지 간 경기

2

0

3세트 이하 경기

3

5

총 경기 수

173

124

총 상금액

48만4813달러

1398만3874달러

별명

코트의 무하메드 알리

떼제베(TGV)

자이언트 킬러

클레이 코트의 왕

엘 마타도르(투우사)

황소

마요르카의 미노타우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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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도 아니다. 프랑스가 뒤집혔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한 떼제베(TGV)" 총가 덕분이다. 프랑스만이 아니다. 호주 오픈이 열리고 있는 멜버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유럽 등의 테니스팬들은 총가를 보면서 "테니스계의 무하메드 알리"라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한국에서도 크게 다를 게 없다. 테니스 게시판 등을 돌다보면 모두 총가 얘기 뿐이다. 급기야 22살의 조 윌프리드 총가(Joe Wilfried Tsonga)는 이 전통의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눈 앞에 단 세명만을 남겨둔 채 4강까지 올라섰다. 단 세 명은 그저 그런 세 명이 아니다. '황제' 로저 페더러와 랭킹 2위의 라파엘 나달, 3위의 노박 조코비치. 모두 최고의 선수들이다. 지금 총가의 홈페이지에는 "하나, 둘, 셋 그리고 총가!"라는 구호가 올라 있다. 도대체, 어떤 이변이 일어날까.

서비스에이스 68개. 이번 호주오픈에서 현재까지의 최고 서비스에이스 기록이다. 주인공은 페더러, 그리고 바로 총가다. 적어도 서비스에서는 세계랭킹 1위에 전혀 뒤지지 않는 모양새다. 게다가 이 서비스에이스가 약한 선수들 앞에서 터져나왔던 것도 아니었다. 앤디 머레이(9위)와 리샤르 가스케(8위), 미하일 유즈니(14위)를 상대로 뽑아낸 기록인 것이다. 이들에게 무명의 총가가 이길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총가의 세계랭킹은 38위에 불과한데, 그나마 2년 전 345위에서 급격히 상승했다. 이 정도면 거의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수준이다. 폭발적인 서비스에이스는 곧바로 바람처럼 달려드는 '서브&발리'로 이어진다. 아무리 상대방의 리턴이 거세고, 패싱샷이 날카로워도, 총가는 좀처럼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호주오픈 동영상에서 본 총가의 경기는 경이적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쉽게 점수를 따고, 어렵게 점수를 내주는 스타일의 경기였다. 서비스에이스와 과감한 네트플레이, 물러서지 않는 공격성 덕분에 총가는 랠리가 거의 없이 점수를 낸다. 하지만 총가가 리턴을 할 때 상대방이 그에게서 포인트를 뽑아내려면 기나긴 랠리를 벌여야만 한다. 젊고, 파워가 넘치는 총가는 아무리 힘든 코스도 포기하지 않고 받아내며 상대를 괴롭힌다. 물론 먼저 지쳐 떨어지는 건 상대방이다.

총가의 홈페이지에 적힌 "만약 꼭 필요한 기술이 있다면(
Si tu devais avoir)" 코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달과 맞붙을 4강전의 결과가 궁금하다.

Si tu devais avoir :

Le Service de(서비스): Roddick(로딕)

Le Retour(리턴) : Agassi(애거시)

Le Coup droit(포핸드) : El Aynaoui(유네스 엘 아이나위)

Le Revers(백핸드) : Federrer(페더러)

Le Volée(발리) : Sampras(샘프라스)

Le Passing shot(패싱샷) : Shrichapan(파라돈 스리차판)

L’ Amortie(드롭샷) : Coria(기예르모 코리아)

Le Lob(로브) : Hewitt(휴잇)

Le Smash(스매시) : Henmann(헨만)

Le Jeu de jambes(스텝) : Clément(아르노 클레망)

Le Physique(체력) : Canas(기예르모 카나스)

Le Mental(정신력; 멘탈) : Hewitt(휴잇)

Le Palmarès(승리의 영광) : Sampras(샘프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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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이바니세비치에게는 불행이었다. 하필이면 그들 둘이라니. 테니스 선수라면 한 번 올라서기만 해도 영광일 윔블던 센터코트에서 그는 번번이 피트 샘프라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2001년, 30을 넘긴 나이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해서 깜짝 우승을 했을 때 사람들은 이바니세비치에게 '제2의 전성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2002년, 윔블던은 호주의 레이튼 휴잇에게 돌아갔고, 다음해부터는 '페더러의 시대'가 열렸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회 연속 우승. 페더러는 대기록을 세운다. 비욘 보그 이후 27년 만의 일이었다.

테니스의 영웅들은 많았다. 누군가는 서브의 달인이었고, 누군가는 세계 최고의 포핸드 스트로크를 자랑했으며, 공을 라켓에 붙이고 다니는 것 같다는 별명을 듣는 초특급 발리어도 존재했다. 하지만 피트 샘프라스와 같은 선수는 없었다. 안드레 애거시, 고란 이바니세비치, 보리스 베커... 샘프라스의 라이벌들은 단연 세계 최고였다. 그들과 함께 메이저 대회를 뛰어다니며 샘프라스는 윔블던 7회 우승, 메이저대회 14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페더러도 못지 않다. 샘프라스를 우상처럼 여기며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던 그는, 샘프라스조차 이루지 못한 윔블던 5연패를 벌써 이뤘고, 무엇보다 아직도 한창 나이다.

두 사람의 시합을 볼 수 있다는 건 마치 '로키 발보아'를 보는 것 같은 흥분과 긴장이었다. 물론, 로키처럼 샘프라스가 투지를 불태웠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녹슬지 않은 서브와 위력적인 스트로크, 깊고 날카롭게 파고 드는 슬라이스는 한창의 페더러마저 쩔쩔매게 만들었다.

지난해 이맘 때 열린 현대카드 슈퍼매치에서는 세계 1, 2위인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이 맞붙었다. 지난해 경기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와 같았다. 경기 내내 두 라이벌은 유쾌했고, 재미있는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진기명기 시합'같은 장면도 연출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 시합은 일종의 '제의'였다. 페더러는 우상을 상대로 아무런 장난도 치지 않았고, 참혹하다 싶을만큼 몰아붙여 6-4, 6-3의 일방적 스코어로 승리를 가져갔다. 샘프라스는 페더러로부터 15개의 서비스 에이스를 뽑아냈다. 그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p.s. 늘 페더러를 보면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 없이 강력한 서브, 파워풀한 포핸드 탑스핀, 칼날같은 슬라이스, 포핸드만큼 강력한 우아한 백핸드 스트로크, 거리를 줄자로 계산한 듯한 드롭 발리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코트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한 움직임이다. 공이 언제 어떻게 흘러갈지를 계산하고 있는 듯한 동물적인 움직임은 늘 상대방의 허를 찌른다. 샘프라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아마도 쏙 빼닮았을 이 괴물같은 후배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Posted by 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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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테니스 레슨을 받고 나오면, 몹시 배가 고프다. 아침부터 땀을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기분을 이용해 평소보다 더 과식을 할까봐 오히려 아침은 살살 먹게 된다. 그러다보니 점심 식사 시간은 무척 기다려지게 마련이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팠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나의 점심 시간을.

그런데, 매너없는 상대방이 점심 약속을 해놓고서는 약속시간 5분 전에 전화를 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못 나가겠는데요, 대신 저희 팀에 다른 사람을 보낼게요."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약속을 여러번 변경해가면서 이날 점심 약속을 잡았던 거냐? 월요일에도 당신이 개인 사정이 있다면서 약속 미루지 않았던가? 만나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미리 약속을 취소하든지. 다시 전화만 했단 봐라. 내 점심은 그래서 결국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 에스프레소와 오뜨 한조각으로 축소됐다. 고등어 조림을 먹을까, 김치찌개를 먹을까 고민하던 아침의 나는 오간데 없고. 젠장, 젠장, 젠장.

사진 속 몹시도 배고파 라켓까지 씹어먹을 듯 보이는 저 헝그리 테니스 선수는 고란 이바니세비치(Goran Ivanišević). 이바니세비치는 2001년 윔블던에 30살의 나이로 출전한다. 한 때는 193cm의 장신에서 나오는 200km가 넘는 강서브로 세계랭킹 2위까지 올랐던 무시무시한 선수였지만, 이미 이 때는 옛날 얘기가 됐을 때다. 노장, 퇴물 소리를 들으며 125위의 랭킹으로 와일드카드 자격을 받아 윔블던에 간신히 입장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가 코트에 서고 나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결승까지 승승장구하며 올라간 이바니세비치는 호주의 패트릭 라프터를 세트스코어 3대2의 접전 끝에 꺾고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다. 그랜드슬램에 올라설 때마다 그의 앞에는 늘 애거시나 샘프라스가 있었고, 그는 13년 동안 번번히 지기만 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첫 우승, 와일드카드 선수의 첫 우승 등 각종 신기록을 세우며 결국 노장 투혼을 불사르고 만다. 그런 그도, 아마, 배가 고프면 투혼이고 뭐고 없었을 테다. 라켓 씹어먹는 것 좀 봐라. 젠장. 점심약속을 취소하려면 좀 매너있게 1시간 전에는 취소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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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다시 라켓을 손에 잡았다. 두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아뿔싸, 몸으로 배운 건 잊지 않는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었다. 20분 동안의 짧은 레슨시간이 끝날 때가 됐는데, 그립을 감싸 쥔 오른 손 손가락들이 굳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넷째 약지와 다섯째 새끼손가락. 말도 안 된다. 예전에는 절대 힘을 주지 않던 손가락들이었고, 다른 코치는 엄지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으로도 스윙을 할 수 있었던 내게 칭찬까지 해주곤 했다. 불필요한 힘이 없다고.

그런데, 두달간의 공백기가 자세를 무너뜨린 모양이다. 역시 꾸준히 했어야 하는데... 손이 굳은 나를 보며 코치가 다가와서 그립을 보더니 또 한 마디 했다.
 
"손도 작으신 분이 왜 이리 굵은 그립을 매셨어요? 다른 그립으로 바꿔 감아 드릴게요."

일부러 따로 주문해서 감은 특제 오버그립인데, 무참히 무시하다니. 흑흑.

김코치 어록이라도 쓰고 싶다. 지난번에 서브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주 나오셔야 새 기술을 배우죠. 일주일에 한두번 나오면서 어떻게 진도를 나가요?"라더라. 맞는 말을 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열심히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이를 어쩌남. 테니스를 다시 시작한지 2년 째, 하지만 다시 시작한지 6개월 째 이후로 1년 반 동안 도무지 진전이 없다. 열심히 좀 해보자. 페더러처럼 우아하고 절제된 테니스를 칠 때까지.(실력 말고 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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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30분. 머리가 멍하다. 알람이 울린다. 보라색 알람 시계. 싸구려 중국제 플라스틱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그 덕분에 직접 쇠 추로 쇠 종을 때리며 '확실하게' 기상 시간을 알려주는 고마운 놈이다.

6시 35분. 알람이 또 울린다. 쇠 추로 쇠 종을 때리는 '따르릉' 소리. 5분 전에 난 이 시계의 앞 유리를 누르면 작동하는 '5분 뒤 알림(snooze)' 기능을 눌러 버렸다.

6시 40분. 또 울렸다. 이 정도면 병이다. 벌써 두 번 째.

6시 45분. 헉. 40분에는 일어나려고 했는데. 허둥지둥 침대를 나선다. 뒷머리가 뻐근한 것 같고, 다리엔 힘도 잘 안 들어가지만 우선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간다. 미끈한 스텐레스 샤워기를 켜면 차가운 물이 쏟아진다. 물에 데워질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10초를 생각하다 눈이 스르르 감기려고 한다. 그 때, 뜨거운 물이 쏟아져서 잠을 깬다. 온도를 적정수준으로 조절하고는 머리에 가져다 댄다. 대충 적시자. 눈에 물이 들어가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 왼 손을 뻗어 왼쪽 벽을 더듬거린다. 차가운 타일 옆으로 수건이 손에 잡힌다. 슥슥. 잠을 깨고, 눈을 닦고, 머리의 물기를 아주 대충 털어낸다.

6시 50분. 라켓을 꺼내든다. 90도 직각이 될 때까지 양쪽 무릎을 번갈아 올렸다 내렸다하면서 팔목 밴드를 찾는다.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는다. 맞다. 이때까지는 그냥 속옷 차림.

6시 55분. 6개월은 된 것 같다. 코치가 창살 너머로 밖을 내다보다 헉헉거리며 언덕길을 달려 올라오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7시. 그립은 손바닥에 찰싹 감기고, 빈 스윙을 해봤더니 감각도 좋다. 네트를 마주 보고, 코치가 공을 날린다. 턱. 공이 또 프레임에 걸린다. 공을 끝까지 보고... 속으로 되뇌인다. 이번엔 손목이 꺾인다. 위치를 제대로 못 잡고 공에 너무 다가붙었다. 그러고 났더니 이번엔 스윙이 너무 늦다. 타점을 못 잡는다는 소리다. 갑갑한 코치가 공을 때릴 타이밍을 불러준다. "하나, 둘, 셋" 테니스 코치들은 하루에 하나 둘 셋을 천 번도 넘게 외치다가 후두염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을 끝까지 보고, 스플릿 스텝을 하며, 작은 걸음으로 이동해서, 몸 앞에서 공을 때리고, 손목을 쓰지 않는다... 하나하나 생각하다보니 공을 끝까지 보는 게 또 안 되기 시작한다. 젠장.

7시 20분. 온 몸이 땀에 젖었다. 보슬비가 내린다. 날은 꽤 추운 것 같은데, 별로 춥지는 않다. 후추라도 살짝 뿌려놓은 것처럼 약간 매캐한 새벽 공기, 몸에서 올라오는 땀이 증발하는 증기, 젖은 트레이닝복, 그리고 까맣게 변색되기 시작하는 내 라켓의 그립. 다시 새벽 레슨을 시작하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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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개월동안:
당신의 스트로크를 비디오캠으로 찍기 위해 배터리를 두번 이상 소모했는가?
포핸드 스트로크를 점검하기 위해 한번쯤은 거울 앞에서 20분 이상 서 있어본 적이 있는가?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몰래 스윙 연습을 해 본적이 있는가?

위의 세 물음중 어느 하나 이상 ‘예’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테니스 동호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박 장애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병명은 ‘스트로카이티스’(Strokeitis). 증상은 ‘완벽한 테니스 스트로크를 찾아내고, 발전시키고, 갈고 닦는데 심각한 집착을 보임’.

너무나 완벽하게, 나를 비꼬는 말처럼 들린다. 테니스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온 이 글은 '도무지 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었다. 스트로크는 코치가 열심히 공을 던져준다면 빠른 시간 동안에 배울 수 있으니 어느 정도 배웠다면,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뛰어서 정확한 위치에서 공을 치라는 얘기다. 단순한 건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충고에 따르지 못한다.

이번 주말, 모처럼 시합 예정이 잡혀 있다. 처음 시작할 땐 아무 생각 없이 한 판 붙어보자는 의도였는데, 같이 치기로 한 동생이 "형, 나 이제 우리 학교대표팀 1군에 올라가려고 심사받기 직전이거든?"이라는거다. 뻔히 예상되는 패배의 반복... ㅠ_ㅠ;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다.

"프로들을 보기 바란다. 이들이 라켓을 잡고 스윙하는 것은 각자 다를지라도 한가지만은 공통적으로 매우 잘한다: 다리를 움직이는것. 완벽한 포핸드를 갈고닦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거울앞에서 보내지만 말고, 대신에 밖에 나가서 줄넘기라도 한 번 하고 풋워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

달리기라도 한 번 더 해야겠다. 두려워하지만 말고. 아, 좀, 만만한 상대를 찾아서 한번쯤 이겨봐야 자신감이 붙을텐데말야!
Posted by 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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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땀흘려 번 월급을 갖고 도박을 하는 사람은 없다. 티오프를 하면서 무조건 홀인원만 노리는 사람도 없다. 포커판에서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레이스를 거는 사람도 없다.

보수적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 사실 인생의 지혜와 같은 거다. 삶이라는 레이스에서 적어도 지지 않기 위한 지혜.

테니스의 스트로크 랠리가 그런 게 아닐까. 지지 않으려면 일단 공을 제대로 리턴해야 한다. 무조건 위닝샷만 노리는 사람은 안전한 리턴을 노리는 사람보다 실수가 잦게 마련이다. 테니스는 공격적인 스포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수를 적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은 스포츠다. 우리는 그걸 '확률 테니스'라고 부른다.

'이기기 위한 시합'이라는 건 얼마나 재미없겠느냐마는, 적어도 크게 지지 않기 위해 월급의 100%를 레이스에 걸지 않는 지혜는 필요하다.

찬스가 왔을 때,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도 도박을 걸고, 티오프에서 홀인원을 노리며, 첫 판에서 레이스를 걸고, 패스트푸드 점에서 61년산 슈발 블랑을 따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찬스가 왔을 때의 얘기다. 말하자면, 지금은 리턴을 할 시기라는 거다. 지지 않기 위한.

스트로크에도 위닝샷이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위닝샷만 때려댈 수는 없다.

이날의 게임 스코어는 6-3, 8-6. 불행히도 또 참패. 하지만 가능성이 보였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