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07.08.12 여행같은 일상 ver. 2.0
  2. 2007.03.05 바다
  3. 2007.03.04 설악산 등반
토끼머리2007. 8. 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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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나는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곳은 수많은 여행지 가운데 하나이고, 집을 떠나 머물고 있을 저 곳은 수많은 집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믿어왔다. 내 일상은 그래서 늘 여행이었다. 행선지를 정하고, 교통편을 마련하고, 배낭을 단촐하게 꾸리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오늘을 떠나는.

결혼은 이런 여행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훌쩍 생각날 때 떠나지 못하고,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길이라고만 여겼다.

지난해, 터키로 떠나기 3개월 전. 나는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2개월 전에는 대략의 여행 루트를 마음 속으로 정했다. 1개월 전에는 숙소 1, 2곳을 역시 마음 속으로 정할 수 있었다. 출발 일주일 전에는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목록으로 작성하기 시작했고, 여행서를 샀다. 출발 전날, 나는 평소와 똑같이 잠을 설쳤고, 달러를 약간 챙겼으며, 미리 준비한 목록에 따라 배낭을 단촐하게 쌌다.

그러고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썬크림을 두고온 사실을 깨달았다. 자정에야 도착한 공항에서는 마지막 버스가 떠나 버렸다. 시내로 가려면 택시를 타는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기껏 흥정 끝에 선택한 호텔은 생각보다 허름하고, 또 외진 곳에 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기아 소피아는 사실상의 여행 첫 날인 월요일이 정기 휴관일이었다. 대충 짜 놓았던 여행 루트는 여행을 하는 기간 내내 바뀌었으며, 괜찮아 보이는 서비스나 상품은 무엇이든 예상보다 값이 비쌌다.

지금, 결혼을 3개월 앞둔 나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고 선배들의 인생 경험담을 듣고 있다.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신혼여행지를 고르며, 살 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2개월 전에는 턱시도를 입은 채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을 테고, 1개월 전에는 이곳저곳에 인사를 다니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청첩장을 발송하느라 정신이 없을 게 뻔하다. 그 모든 부산한 과정을 위해 웨딩 플래너가 옆에서 상담을 해주고 있고, 허니문 플래너라는 새로운 직업도 만나게 됐다. 양가 부모도, 신부가 될 사람도, 나 스스로도 모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러고도 막상 결혼 생활이 시작되면 이곳저곳에서 실수가 생겨날 것이다. 빨래를 어디에 모을지, 쓰레기는 누가 버릴지, 새 집에서 출퇴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러다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지도 모르고, 큰 소리나 긴 침묵이 생길지도 모른다. 대출과 예금, 투자와 생활비 등 한 번도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들이 모두 눈 앞에 닥치면 그 순간들은 어떻게 넘겨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터키는 최고의 여행지였다. 하기아 소피아는 장엄했고, 수시로 바뀐 여행 루트는 최고의 효율을 안겨 줬으며, 보석같은 작은 도시들에서 꿈같은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결혼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비용이 들지, 어떤 예측불가능함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최고의 여행이지 않을까.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다. 한 번도 떠나보지 못했던 둘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가슴이 설레는. 나는 지금 행선지를 정하고, 교통편을 마련하고, 배낭을 단촐하게 싸는 중이다. 여행같은 일상 ver. 2.0을 위해서.

Posted by 흰솔
동상이몽2007. 3. 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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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아직 어두운 새벽. 창밖너머 해안선 가득히 밝은 불빛을 단 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에겐 일상의 공간일 그곳이 이방인의 눈엔 그저 낭만적으로 보인다. 풍경을 배회하고 산책하는 것은 이방인의 몫이다.

낯선 공간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감탄한다. 어린아이처럼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어디쯤인가 생각한다.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르고, 잘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거나 멀쭘하게 마주 설 일도 없다.

늘 들리는 파도 소리도, 매섭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3월 초의 미묘한 바람도, 비릿한 내음도 그저 근사하다.
Posted by Purslane
동상이몽2007. 3. 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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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내딛을수록 하늘과 가까워졌다.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구름이 다가왔고, 앞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을 돌무더기들이 모여 있는 공터가 나타났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메아리로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 같기도 했고, 비명 소리처럼도 들렸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온 몸의 구석구석에 차갑고 끈끈하게 엉겨 붙었고, 안경마저 뿌옇게 변해 한치 앞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바위를 밟으면 발이 미끄러졌고, 흙을 밟으면 발이 진흙에 휘감겨 바닥에 붙잡힌 듯 했다. 옷은 젖어서 무거워졌고, 온도는 점점 내려갔다. 구름은 부슬비를 뿌렸다. 조금씩 지쳐왔다. 우리의 말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얼굴 표정도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굳어만 갔다.
설악산의 봄이었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