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2007. 2. 24.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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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구하질 못해서 2003년 것을 올리지만, 사실 우리가 마셨던 것은 2002년 빈티지였다. 바니에르란 샤또의 이름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포도 품종 자체가 흔히 마시는 품종이 아니었다. 무르베드르(Mourvedre) 90%, 그르나슈 10%의 블렌딩. 무르베드르라는 포도가 가진 특징이란 게 아마도 몹시도 거칠고, 꽤나 스스로의 향을 강조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조금 더 기다렸어야 마땅했겠지만, 디캔터에 옮겨놓으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억지로라도 마셔버리고 말겠다는 사람들이 가득한 모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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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바니에르가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후다닥 마셔버렸던 이 와인이 더 맘에 들었다. 그 유명한 로버트 몬다비. 소노마와 나파 밸리 남단의 카네로스 지역. 캘리포니아 와인은 딱 미국인 같다. 직설적이고, 근면하며, 성격이 쾌활해 쉽게 사귈 수 있다. 프랑스 와인처럼 복잡미묘하고 섬세한 맛은 없지만, 분명한 뭔가가 필요할 때엔 캘리포니아가 낫다.

업무로 만나는 분들과 함께 갔던 곳은 로마네 콩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 집은 뭐가 그리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데 값도 비싸고, 서비스도 그냥 그 타령이다. 그런데도 꼭 일행 중에 여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들 그러는 걸까. 이름 값이란 건 무섭다. 정말.

p.s. 지나고나서 알고보니, 카네로스의 자랑은 메를로가 아니라 '피노 느와'다. 그 까다로운 피노 느와를 자라게 할 수 있는 서늘한 바람이 특징이라고... 피노 느와만큼이나 유명한 다른 포도는 샤도네. 메를로는 그저 '재배되기는 하는' 정도의 품종이었구만. ㅜㅜ; 좋던데 말이지...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2. 2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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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와인은 어려워서 다가서기 힘들 줄로만 알았다. 우리가 아는 부르고뉴 와인이라고 해봐야, 에세조, 리시부르 등 도저히 돈을 내고 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와인들이 대부분이니까. 게다가 피노 느와 하나로만 만드는 와인이란 건, 사람 기를 죽이기 십상이다. 부르고뉴의 피노 느와를 마시려면 내 혀가 더 섬세해야 하고, 내 자세도 더 느끼려고 노력해야 될 것만 같았다. 여러 종류의 포도를 섞어 만들어 마시다보면 자유롭고 화려하게 변화하는 보르도의 블렌딩 와인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한 거다.

사비니 레 본의 와인들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대학 동창들과의 술자리, 선배가 호기롭게 "예산은 15만 원이니까 적당히 골라봐"라고 말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냉큼 피노를 고르려고 했고, 서울와인스쿨에서는 사비니 레 본 레 라비에르와 뉘 생 조지를 추천했다. 선택은 사비니 레 본, 나쁘지 않았다.

선배가 추천한 가게는 서울와인스쿨. 얘기는 전에도 들어봤는데, 직접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와인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건물의 3층. 허름한 곳에 담배연기와 치즈향이 가득했고, 곳곳에서 와인병들이 부산스레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고, 비싸지도 않은 곳. 다만 집에서 너무 멀다는 게 흠이다.
Posted by 흰솔
동상이몽2007. 2. 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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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ve Song For Bobby Long, 2004 Directed by Shainee Gabel


He'd make a lovely corpse. - Charles Dickens <Martin Chuzzlewit>

사랑했던 사람을 추억하는 눈빛. 하얗게 센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는 차에서 내리며 여기서 인도India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바비. 그러나 우리는 첫 장면에서 바비 롱의 푸르스름한 엄지발가락과 거기에 붙어서 그냥 생채기정도라는 듯 귀엽게 씽긋 웃는 노란 밴드를 보았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다니면서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노쇠한 모습에 연민이 느껴진다.

그는 친구 로레인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로레인의 딸 퍼슬레인에게 전화로 연락을 하지만 그녀는 너무 늦게 도착한다. 그렇다. 딸은 늘 어머니를 추억하며 살았지만 한번도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가 살던 뉴올리언즈의 집에 머물면서 로레인을 기억하는 흔적들로 인해 잊고있던 어린시절과 만난다. 모든 사람들이 로레인을 추억하지만 정작 사진 한장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불렀다는 목소리도 한번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남겼던 애정과 악보가 남아있다.

아, 로레인. 그녀를 떠올리는 친구들의 눈빛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본다. 도시를 동경하며 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골 소녀. 늙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애정이 담긴 표정. 퍼슬레인을 보며 어머니를 꼭 닮았구나 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표정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퍼슬레인이 어머니의 낡은 집에서 바비와 살게 되면서 막 이사라도 온 것처럼 지저분하던 곳이 조금씩 바뀐다. 그녀는 페인트 칠을 새로 하고,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고, 간이 침대 대신 가구를 들여놓고, 블라인드를 올려 집안에 빛이 들게 한다. 그렇다. 로레인의 사진은  나올 필요가 없었다. 퍼슬레인의 모습에 상냥하면서 영리했을 로레인이 보이기 때문이다.

퍼슬레인은 다른 꽃 옆에서 자라는 잡초이다. 민들레같은 잡초이다. 그리고 태양이 지면 함께 진다. 들판에 피었있는 꽃처럼 거칠고 불안해보였던 그녀는 바비 롱을 만나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그리고 바비 롱으로 하여금 자식에게 못다한 애정을 쏟도록 만들어 준다.

오프닝에서 바비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퍼슬레인이 다시 걷는다. 장례식에 가던 지친 모습의 바비와 달리 퍼시의 발걸음은 가볍고 힘차다. 로레인의 무덤가에 바비 롱을 위한 연가와, 어머니의 악보와 퍼슬레인 꽃을 내려놓는다.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있는 바비 롱의 비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묘하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I just want to breathe in every day. "Happiness makes up in height what it lacks in length." - Robert Frost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