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길모퉁이'에 해당되는 글 30건

  1. 2007.06.25 책꽂이 정리
  2. 2007.06.22 번역 2
  3. 2007.06.19 2
  4. 2007.06.06 앵두와 체리 3
  5. 2007.05.18 근황 2
  6. 2007.04.12 캐럴예찬 4
  7. 2007.03.28 추위 4
  8. 2007.03.18 정답
  9. 2007.03.13 아이스크림 2
  10. 2007.03.11 SHOW 2
Purslane/길모퉁이2007. 6. 2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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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을 비웠다. 틈틈이 집에 가져갈까 생각해왔었지만 책이라는게 다섯 권만 되어도 무게가 보통이 아니어서 이내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쌓인 책과 자료들 일년 치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논문작성자 열람실을 쓰면서 차곡차곡 읽었던 사이보그 관련 책이 1/3쯤 되었고, 이번에 논문을 쓰면서 모은 자료들이 절반이 좀 넘었다.

부시럭부시럭 대면서 정리를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공부하겠다고 나온 캐럴 바깥쪽에 앉은 두 커플에겐 미안하지만 (소리가 얼마나 들리는지는 잘 모른다) 오며가며 보니 옆구리 찔러가며 노는 모양새가 별로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책 몇 개 만지고 고새 먼지 날린다고 재채기를 하며 요란을 떨었다.

차를 가져가서 한번에 옮기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쇼핑백을 몇 개 준비해갔다. 두어번만 움직이면 될 줄 알았다. 차도 일부러 지하주차장이 아닌 교우회관 쪽에 댔다. 마침 날씨도 흐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았다. 사진 속 쇼핑백이 5개이고 아직 못 들어간 저 책들은 나중에 쇼핑백을 차에 비우고 다시 가져와서 나눠 넣었다. 총 7개. 일단 정리를 마치고 잠시 서서 무겁게 3개씩 들고 내려갈 것인가. 2개씩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것인가 고민했다.

두개도 들어보고 세 개도 들어봤다. 아, 세 개는 무리다. 내 핸드백을 들고 내려가는 것까지 포함하여 총 4번을 왕복했다. 한번 다녀오고나서 머리가 핑 돌아서 다녀올 때마다 5분씩 쉬었다. 그 와중에 반납이 임박한 아직 못 읽은 책까지 읽느라 거의 한시간 반이 걸렸다.

더 큰 문제는 이것들을 내 방으로 옮기고 나니 이미 만원인 책꽂이에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버려야 할 것도 있을 텐데 애써모은 자료라는게 잘 버려지지도 않고 책은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모은 자료들은 스테플러로 찍어서 클리어화일에 모아놓았는데, 이래서야 책꽂이에 꽂으면 나중에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줘야하고, 적당히 묶어서 파일에 넣어줘야 한다. 이런.

빈자리를 만드는게 급선무라 책꽂이의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큰 맘 먹고 잔뜩 버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종이가 배출되었다. 50개쯤 남은 비디오 테잎 중에 또 20개쯤 버렸다. 지난번에도 스무개 정도를 버렸더니 분리수거하시는 경비아저씨가 한번에 그렇게 많이 버리면 안된다고 하셔서 나눠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걸 몇 주에 걸쳐서 내놔야 하는군. 더 이상 듣지 않는 테잎도 20개쯤 내놨다.

그렇게 정리하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저녁 8시가 되도록 정리를 못끝냈고, 지금 내 방은 발디딜 틈도 없다. 학부 때부터 버리지 못한 수업 자료들까지 정리해볼 심산으로 다 꺼내놓았는데, 일일이 훑어보고 정리하려면 일주일도 부족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어깨가 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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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6. 22. 15:08

본의아니게 번역할 일이 생겼다.

학부 전공이 영문학이다보니 초면에 전공을 묻다보면 늘 듣는 말이 '영어 잘하시겠네요'이다. 아, 그중에 몇몇은 '영어를 잘해서 좋겠네요'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늘 절대 아니라고(절대를 강조해서) 말해도 사람들은 겸손함 쯤으로 치부해버리고 곧 잊어버린다. 정말이지 아니라고 말할 땐 믿어줘야 한다.

같이 공부해본 사람들에겐 이미 겸손하게 '아니에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뽀록난 상태이지만 딱히 검증을 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막연히 잘하겠거니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오는 불상사가 가끔 생긴다.

번역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일인지 해본 사람들은 안다. 누구는 적당한 어휘를 찾느라 하루종일 고생하다가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을 찾아내고 희열을 느꼈다는데, 나라며 돈 돌려주고 책을 덮어버릴 거다.

게다가 이렇게 부탁받는 글들은 관심분야가 아니라서 재미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
이번 번역도 돈을 아무리 줘도 차라리 주말에는 그냥 놀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거절했었다.(많았으면 달랐을지도 ☞☜)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다가 결국 사람이 없었는지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설문조사결과를 정리한 것이 절반 이상이라 그다지 어렵진 않았지만 처음해보는 분야인데다 별 관심이 없으니 시간이 5배는 더 걸린다. 한줄 번역하고 커피마시고, 한줄 번역하고 문자보내고, 한줄 번역하고 냉장고에 뭐 있나 열어보고. 이러다 보니 2-3시간이면 끝날 분량이 하루종일 걸리기도 했다.

수요일에 초고를 보냈는데 불상사에 불상사가 겹쳐, 나와 절반을 나누기로 한 분이 착각을 하시고 내가 번역한 부분을 열심히 번역해 오셨다. 의뢰를 한 곳에서 시간이 촉박하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통에 졸지에 그분 것을 다시 절반으로 나누어 추가로 일을 하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해도 잘 안풀리는 모양이다.

이제 한문단만 끝내면 되는데 또 이렇게 딴짓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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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6. 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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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모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다.
최근 앨범을 낼때마다 크게 인기를 끌지도 못했고, 가끔 출연하는 쇼·오락프로그램에서도 어울리지 못했다. 나이를 잘은 모르지만 마흔이 다되어 갈 거다. 20대 초반의 젊고 덩치좋은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보였고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주변의 중론도 그러하였는지 최근엔 게임 프로그램엔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토크쇼를 표방한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재기발랄하고 MC를 휘어잡던 말솜씨는 어느새 조근조근한 말투로 변해있었다. 개그맨보다 더 웃긴 가수였던 걸로 기억했는데 어느새 MC와 스텝들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던가. 10초에 한번씩 톡톡 튀어줘야 하는 요즘 트렌드와 멀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낯설었다. 어쩌면 이번 방송은 그동안 <무릎팍 도사> 중 제일 재미 없었을 지도 모른다. 작은 키에 까만 얼굴도 매력이었는데, 이젠 술과 담배는 늘고 외로운 일상을 사는 노총각 이미지에 점점 떨어지는 인기와 음반판매량을 정확히 수치로 보여주면서 실패자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답답한 기분이 들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코너가 끝나갈 때 쯤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하늘을 날고 싶다는 대답은 우문현답이었다. 질문에는 앞뒤 맥락도 없었다. 진행자가 무슨 질문을 해도 보편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한숨을 푹푹쉬며(게스트 잘못 불렀다, 내지는 오늘 방송 망했구나라는 표정으로) 아무 질문나 던진다는게 당신의 마지막 꿈은 무엇입니까였다. 역시 이 대답을 들으며 당황해하는 진행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집을 사고 싶고, 큰 차를 타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건 노력하면 이룰 수 있잖아요. 꿈은 소망하는 거구요. 저는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요.

바로 초등학생 같다는 비웃음을 받았지만 나는 그 한마디로 조금 전까지 그가 하던 모든 말이 계산하지 않은 솔직함 일거라고 믿어보고 싶어졌다. 아무렴 어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좋은거지. 나는 어디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던가. 목표 대신 꿈을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흠.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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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6. 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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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그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사실 잘 모른다. 언제 먹을 수 있는 건지. 그냥 한여름이 되기 전에 한동안 맛있는 과일이 쏟아진다는 막연한 감 밖에는.
과일 가게에 산딸기, 앵두같은 빨간 과일들이 보이면 무척 반갑다.

며칠 전에 먹은 자두는 아직 시큼했고, 앵두는 너무 어렸다.
오늘 산 체리는 대성공! 정말 맛있다!
새빨갛고 말랑말랑한 자두와 통통한 앵두와 검붉은 체리의 계절.
아. 행복해.

매번년 만끽할 수 있는 기간이 짧다고 느껴진다.
두쪽만 먹어도 배부른 수박과 번거로운 포도의 계절이 오기 전에 열심히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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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5. 1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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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아직 적응단계라 업무가 많지는 않다. 바뀐 환경에 빨리 익숙해지려고 노력중이다. 전철로 7분거리에 있던 학교를 다니다가 한 시간 거리의 회사를 다니는게 걱정 됐지만 생각해보면 여의도로 출퇴근하던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전철을 타고 한번에 움직일 수 있어서 오히려 나은지도 모르겠다.

처음하는 일은 어설프기 마련이라 제대로 해보려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려고 해서인지 5일째 눈밑에 경련이 멈추질 않는다. 화요일쯤엔 너무 심해서 인상을 쓸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음도 안정을 찾아간다. 오늘은 출근할 때까지 떨리다가 점심나절부터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작하는 일도 일이지만 논문심사가 코앞이라 마음이 불안하다. 6월 20일이 최종심사결과제출이라 약 한달쯤 남았다고 생각했다가 이달 말로 땡겨지는 바람에 발등의 불이 되었다. 심사하시는 교수님 3분 중 한분은 6월1일-10일, 지도교수님은 11일-20일까지 외국에 나가신단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젠 퇴근길에 논문을 쓰러 학교에 들렀다가 학과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었다. 겨우 일주일만에 보는 것 뿐인데 어느새 한발 물러선 기분이 든다. 이럴 줄 알았잖아라고 위안해도 역시 나는 학교가 좋다. 영화보다 극장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공부보다 그냥 학교를 좋아했던 거다.

잔디밭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수만권의 책 앞에서 고르기만 하면 된다는 기쁨을 누리던 소소한 행복이앞으로 꼭 두달 남았다. (물론 논문이 통과된다는 전제하에서 ;;) 월드컵경기장도 나름 공원이 괜찮다. FC 서울 경기를 할때마다 시끄럽긴 하지만 극장도 훌륭하게 가까운 편이다.

나의 출근이 결정되는 것과 비슷한 시기부터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우리 둘 다 정신없이 바빠졌다. 소홀한 블로그에 미안하지만 도통 여유시간이 안난다. 출퇴근 시간에 전철에서 책과 잡지를 읽는 것이 요즘의 여가생활이다(그중 절반은 잔다). 일이 좀 익숙해지면 여기도 변화가 생길 것같다.

나에게 전환점이 되는 시기인 것은 분명한데, 졸업이 결정되지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아직 실감이 안난다. 정신없이 확 바뀌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차근차근 변화해나가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하고 있다. 한번에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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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4. 12. 14:51

8시 55분 학교앞 전철역.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택시들이 보인다. 이미 5-6대의 택시가 아슬아슬하게 1교시 수업에 뛰어가는 학생들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이다. 책을 껴안고 종종 걸음을  하는 학생들 무리가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도서관을 향해 걷는다. 경영대 앞 물소리도 들리고, 잔디도 제법 파래졌다. 도서관 로비는 아직 한산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주섬주섬 열쇠꾸러미를 꺼낸다. 내 방은 4J. 4J라고 쓰인 열쇠를 미리 집어둔다. 캐럴 입구에서 부스럭거리기 미안해서 늘 장전을 하듯 준비해둔다.

4층에 도착하면 3열람실로 들어간다. 작은 파티션이 쳐진 널찍한 열람실이다. 일찍 온 학생들은 이미 구석자리를 선점했다. 대부분 영어책과 두툼한 각종 고시책이 놓여있다. 열람실 제일 안쪽이 캐럴 입구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있다. 10명의 이용자중 내가 제일 처음 왔다는 의미다. 통합키로 바꿔쥐고 얼른 문을 연다. 입구의 문은 육중하다. 손을 밀어도 얼른 닫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면 마지막 순간에 '철컥'하며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힘들어도 꾸욱 밀어서 가능하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

문 바로 앞이 내 방이다.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공간이지만 일단 문을 닫고 들어가면 매우 아늑하다. 상의를 의자에 걸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살살 넣는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와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서 다시 들어간다. 일단 컵에 물은 붓고, 쿠션을 등에 놓고 무릎담요를 치마 위에 얹는다. 이제 한 세시간은 안움직여도 된다. 의자는 적당히 편안하고, 열람실보다 환기도 잘 되는 편이다.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해야 할 분량을 정하고, 수첩을 보며 일정을 확인한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잠시 읽다만 소설책이나 잡지를 뒤적거린다. 이렇게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아니 사실 행복하다. (공부의 진행정도와는 관계없이;;)

이제는 밖에서 힘든일이 있을 때도 캐럴이 생각난다. 아무게도 방해 받지 않고, 조용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란게 살면서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 학교에 오고 싶어서 아침일찍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 운동이고 뭐고 그냥 콕 박혀 있고 싶어서 아무데도 못가겠다. 이젠 학교에서도 한가하게 누구를 만나서 낮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9시에 도착해서 밤 11시를 꽉 채우고 나가도 마음이 편하다. 배도 별로 안고프고, 책은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덩달아 시간도 금방 간다. 실은 잠도 너무 잘 온다.

7월까지라는 한정적인 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직장은 물론이고 집에서조차 자기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힘들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이 마음편히 방해받지 않는 자기 공간이라니. 캐럴을 쓰기 전엔 이 정도로 좋을 줄 몰랐다. 두달만에 나는 캐럴 예찬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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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3. 28. 19:14
춥다. 학교에서 난방을 틀어주고, 연구실에서는 개인 난로를 다리 밑에 갖다 두었는데도 계속 춥다. 뭐 하루종일 연구실에만 있을 수 있나. 밖에 나가면 또 춥다. 근데 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얇은 블라우스하나, 짧은 반바지 하나, 스타킹도 아닌 맨살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나는 지난 주까지도 아침마다 겨울에 입던 코트를 만지작 거렸다. 티쪼가리에 미니스커트 입고 다니는 애들 사이에 코트를 휘날리며 다니기가 민망해서 결국 한번도 못입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대체 나만 추운거야!를 마음 속으로 외쳤다.

목요일을 즈음하여 학과 사무실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동지들에게 나의 심정을 토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그렇다는 위로와 더불어 삼십줄에 들어섰다는 증거라는 등의 좌절 섞인 공감이 쏟아졌다. 그래서 오늘 비록 잠바를 입었지만 목도리를 했다거나, 사실은 이 속에 티셔츠가 하나 더 있다는 고백들 사이로 내복도 한명 있었다. 아. 다들 추웠구나? 이런.

그리고 금요일엔 도서관 앞에서 긴 코트의 여성을 발견했다. 아,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손이라도 잡고 인사하고 싶었다. 역시 얼굴을 보니 내 또래쯤 된 것같다. 역쉬.. 이 학교를 활보하고 다니는 아해들은 우리보다 무려 10살쯤 어리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어제도 정신 못차리고 니트하나 입고 나왔다가 저녁무렵에 미열이 있었다. 집에 가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오렌지 주스와 쌍화차를 잔뜩 마시고 배불러서 잤다. 오늘아침에는 그 위에 옷을 하나 더 껴입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왠 우박섞인 비가 내리는 것이냐. 약속한게 있어서 점심을 먹고 리움으로 향했으나, 여전히 춥다.

초대해주신 선생님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리니 회의를 하다 말고 도록을 챙겨서 내려오신다. 나는 나만 연락을 받은 줄도 모르고 동네방네 워홀전도 보고 도록도 주신다더라고 말했다가 다행히 3명만 같이 가게 되어 그나마 몇부 남지 않은 도록을 잘 챙겨왔다.

전시를 보고 카페에 앉아서 오랜만에 여유있는 오후를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나이 얘기가 나왔다. 십년만에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지하게 어색하다. 게다가 겨우 3개월밖에 안되지 않았나. 이젠 추운것도 나이탓이고, 푸석푸석한 피부도 나이탓이고, 숙취도 나이탓이고, 나쁜 머리도 나이탓이 되는 모양이다.

보기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가 작년까지는 '동안이시네요'로 들렸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으시네요'로 들리니 그것도 나이탓인가.. 그러고보니 나이가지고 구시렁거리는 것도 나이탓이다. 아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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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3. 18. 16:26

무슨 논술학습지였는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논술 광고였다. 선생님이 학생의 글을 보면서 '글은 있는데 생각이 없네'라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뜨끔했다. 주구장창 길게 늘어뜨리긴 했는데,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고 질책하는 것 같다. 긴 글쓰기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생각을 만드는 일은 더 어렵다.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나보다도 어려보이는 예쁜 논술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창피했다.

써야할 글이 세개다. 어느 하나도 치열한 고민없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뭐가 더 급한 건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하려니 마음만 급해진다. 정답이 없는 선택은 늘 힘들다.

요즘처럼 내가  한심해보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나 자신에게 창피했던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우울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상황을 바꾸는 것.

지레 겁먹고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분명히 또 포기해 버렸다고 자책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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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3. 13. 11:23
점심먹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넌 아이스크림에 약한 것같애.
뭐라고?
아이스크림에 약하다고. 아이스크림 들고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쳐다보잖아.
아. 그렇지..
뺏어먹고 싶은 눈빛이야.
응. 먹고싶어.

거참 이상하다. 집에선 냉동실에 가득 채워져 있는 아이스크림은 나만 못먹고 없어지기 일쑤이고, 그렇다고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는 경우도 거의 없다. 술을 많이 마시면 가끔 사먹긴 하는데 그땐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같은 단맛이 땡기는 경우다. 점심을 먹고 나도 커피를 마시지 아이스크림을 떠올리지 않는다. 평소에는 정말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니는 사람만 보면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딱히 각성을 하는데는 종목을 가리지 않지만 특히 콘에 약하다. 길에서 누군가가 들고다니는 걸 보면 참을수 없이 먹고싶어진다. 그래서 소프트한 콘이 어울리지 않는 여름이 되기 전에 여러번 사먹게 된다.  

슬슬 아이스콘을 먹을만한 날씨가 되어간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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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slane/길모퉁이2007. 3. 1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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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시험삼아 WCDMA 폰을 사용하게 되었다. 여행간 여자친구를 대신해 불어로 음식을 주문해주던 남자친구의 그 쇼. 요즘 SHOW는 다양한 활용법을 알려주느라 한창이다. 세상에 나를 중계방송하라거나, 세상에 없던 SHOW를 하란다.

컴퓨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화상통신를 사용하게 된지 벌써 몇년되었지만 사실 집에서 화상전화를 사용하는 일은 별로 없다. 비용이 비싼 것도 아니고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은데 왜 안쓰는 걸까.

쓰려고 해본 적도 없지만 우연히 화상전화를 사용하게 되니 그 이유를 알 것같다. 화면에는 내 얼굴 뿐만 아니라 주위의 환경도 함께 등장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상 개입도의 정도가 상당하다. 부시시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받아야 하고, 엘리베이터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사실은 뻘쭘하고 당황해서 그냥 끊긴 했지만. 상대와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내가 누구와 통화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니 그 역시 민망하다.

대신 SHOW를 할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같다. 몇가지 쑈도 떠올랐는데, 뭐, 일단 나중을 위해 보류. 위치추적 기능이 나오고, 나도 모르게 내 위치를 추적당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곤 하는데 이제보니 영상통화도 만만치 않다. 범죄상황에 빠졌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언제 어디서고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최첨단 기능이 별로 반갑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화상전화는 분명히 재미는 있는데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기는 불편하다. 친구들이랑 놀면서 수업중이라고 거짓말도 못하고, 오전 11시쯤까지 늦잠자다가 잠옷입고 딩굴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민망하고, 약속에 늦었는데 거의 다 왔다는 말도 못할 것 아닌가.. 그래도 조만간 이 기능이 보편화되면 여러가지 버전으로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꾸며서 대체영상도 만들게 될 거고, 봉태규가 도서관 배경을 들고다니던 것처럼 깜찍한 거짓말 기능이 생길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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