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slane/서재2007. 2. 21. 23:10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Life will find a way)"


두 영역의 만남

인문학자와 생물학자의 만남이라는 [대담]을 처음 본 것은 어느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책은 좋아해도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따분하다. 한줄 한줄의 미묘한 재미를 가진 책이라도 뭉뜽그려 소개하다보면 이상하게도 고만고만하고 지루한 소개가 된다. (일부를 뚝 잘라서 읽어주는 낭독 프로그램도 졸린 음악과 어두운 조명과 착한 목소리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한 MC의 목소리로 왠만하면 채널을 돌리게 된다) 이때는 출연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글말과 입말이 다 재미있기란 참 힘든 모양이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을 소개하는 그때는 대담을 나누신 두 분이 나오셔서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아주 오랜만에 재미있는 대화를 보고는 한번쯤 읽어봐야지하고 별렀더랬다. 이게 바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이지.

인문학이든 경제학이든 공학이든 사실 모든 연구는 모로가도 서울, 아니 모로가도 인간이 아니겠는가. 어떤 학문 분야든 결국 인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가고 있으면서도 서로 오랜 시간 멀고 먼 가지를 뻗어가다보니 접합지점 역시 멀리 에둘러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문학과 생물학이라니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생물학자로서 대담에 참여하신 최재천 선생은 이제 단순히 학제 ‘간inter'연구도, 여러 학제를 단순히 통합하는 ’멀티multi'학문으로도 부족하며 단순 조합을 넘어 ‘트랜스trans’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계속 그 시점을 늦추고 있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 더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있으리란 아쉬움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도 쉽게 트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교육의 목적>에서 “과학과 기술, 종교와 예술은 삶의 토대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이 네 가지 활동 영역은 종교와 예술로 분류되는 성찰적 행위와 과학과 기술로 분류되는 창조적 행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결국 이 인간의 활동이 바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구분선을 긋고 서로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생물학은 인문학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많은 신화에서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해 왔고, 생물학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 왔다. 죽음을 고민하고 죽음을 연구하는 두 학문의 만남은 그래서 접점을 찾게 된다. 삶과 죽음, 생명의 유한성과 영혼, 진화론과 선택, 프로이트의 무의식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두 분이 부딪히는 지점은 의외로 꽤 재미있다. (가끔 어깨를 들썩이며 웃느라 혼났다)

인간의 불멸에 대한 욕구

수많은 오류를 저질러온 생물학은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과오와 편견을 만들어냈고,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많은 생물학자들은 여전히 사회의 불평등을 보증한다는 혐의를 받는다. 과학과 이성으로 ‘귀신’을 몰아냈다고 여기지만 ‘귀신’들은 여전히 뒷문으로 들어와 있고,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유한성 문제로 연결된다. 인류 최초의 서사에 등장하는 길가메시 왕도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나고, 기독교에서도 영생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철학도 생물학도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명복제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차치하고서 생명복제의 근본적 목적은 지금 내 삶을 건강하게 연장하려는 목적이다. 생물학의 주요 연구분야인 세포의 죽음에 관한 학문도 노폐물이 쌓여서 죽는 세포의 메커니즘을 찾아서 노화와 질병에 대한 해결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다양성

그러나 세포를 통제하고 생명을 만들어서 원하는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영화 <가타카>처럼 유전자를 조작하여 우성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여도 모두가 우성이면 더럽고 힘든 일을 해야하는 사회의 하층 계급은 누가 맡겠는가. 인위적으로 하층 노예계급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DNA는 언제나 ‘발생학적 잡음’을 만들어 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표현형을 가진 개체를 생성한다.

르윈틴 교수는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의 형질을 조사했는데,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을 세어보니 (거 참, 힘들었겠다) 쌍둥이와 다름없는 초파리들도 늘 겨드랑이 털 개수가 달랐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똑같은 환경 하에서도 발생 과정에서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결과를 도출해 냄으로서 발생과정에는 늘 이런 잡음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것이 진화의 우연성이다.

실상 자연선택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 가장 강력한 메커니즘이다. (p 131) 그래서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Life will find a way)". 암컷만 만들어 놓은 주라기 공원에서도 스스로 염색체를 조절해서 번식을 완성하고 다양성을 만들어 간다. 생명은 늘 자유를 찾아간다. 

도대체 인간의 진화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지, DNA는 왜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 왔는지, 내 몸속에는 어떤 기억이 들어 있는 것인지 아직 해결 할 수는 없다. 생존과 번식이 유전자의 명령이라면 자살하는 인간과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에는 저항하는 뭔가가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에이씨 또 프로이트야. 했다가도 모든 것을 합리성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데 이르면 결국 버리지 못하고 집어 들게 된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두 분의 대담을 통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였다고 할까. 생물학자로서 인문학자들이 가져왔던 편견에 대해, 인문학자로서 생물학의 과학적이라는 오만에 대해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상대를 알기위해 던지는 질문들 속에서 분명히 교과서의 뒤에 붙은 연구학습마냥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두 분이 나눈 논의할 만한 주제들을 정리해 둔 페이지가 따로 준비되어 있으미, 그것을 뒤적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꺼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Purs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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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땀흘려 번 월급을 갖고 도박을 하는 사람은 없다. 티오프를 하면서 무조건 홀인원만 노리는 사람도 없다. 포커판에서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레이스를 거는 사람도 없다.

보수적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 사실 인생의 지혜와 같은 거다. 삶이라는 레이스에서 적어도 지지 않기 위한 지혜.

테니스의 스트로크 랠리가 그런 게 아닐까. 지지 않으려면 일단 공을 제대로 리턴해야 한다. 무조건 위닝샷만 노리는 사람은 안전한 리턴을 노리는 사람보다 실수가 잦게 마련이다. 테니스는 공격적인 스포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수를 적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은 스포츠다. 우리는 그걸 '확률 테니스'라고 부른다.

'이기기 위한 시합'이라는 건 얼마나 재미없겠느냐마는, 적어도 크게 지지 않기 위해 월급의 100%를 레이스에 걸지 않는 지혜는 필요하다.

찬스가 왔을 때,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도 도박을 걸고, 티오프에서 홀인원을 노리며, 첫 판에서 레이스를 걸고, 패스트푸드 점에서 61년산 슈발 블랑을 따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찬스가 왔을 때의 얘기다. 말하자면, 지금은 리턴을 할 시기라는 거다. 지지 않기 위한.

스트로크에도 위닝샷이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위닝샷만 때려댈 수는 없다.

이날의 게임 스코어는 6-3, 8-6. 불행히도 또 참패. 하지만 가능성이 보였다.

Posted by 흰솔
Purslane/서재2007. 2. 21. 22:58

오랜만에 친구에게 책을 선물했다. 책을 선물하는 행위는 옷을 선물하는 행위만큼이나 무모한 짓이다. 사이즈가 같다고 주는대로 입게 되지 않듯이, 자신만이 아는 미묘함을 포착해내지 못한다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과 다름없다. 내 옷장위에 있는 4개의 박스 중 2개는 엄마가 사다준 옷들이다. 내가 사입는 옷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서 도통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이라 그렇게 몇년 빈둥빈둥 놀다가 재활용통에 들어가게될 것들이다.

하물며 엄마도 그러한데 가끔 책을 읽다가 이거라면 괜찮을 거라는 착각이 들어 덜컥 남의 손에 쥐어주는 짓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만큼 읽으면서 사랑스러웠노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저자인 앤 페디먼처럼 독서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냥 평범한 독자이다. 책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집안에 들어오면 책을 읽는 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냥 목록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흐뭇해진다.

책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애정을 가진 앤과 조지의 결혼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서재의 결혼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함께 산지 5년이 넘었고 아이도 태어났지만 감히 서재를 합치는 일을 하지 못했던 이 부부가 서재를 합치기로 하면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다.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사는 남편 조지는 3차원 물체들에게 전폭적 신뢰를 보내며 자신이 원하는 물건은 저절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이다. (알만하다.) 반면 앤은 그것들이 방랑자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늘 같은 자리에 놓아두는 사람이다.

서재를 결혼 시키는 첫번째 난관은 영국문학을 연대 순으로, 미국문학을 저자 이름순으로 정리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앤은 600여년의 영문학 책들은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문학의 흐름을 볼 수 있으나, 미국 문학을 시대순으로 꽂으려면 쪼잔하게 따져야한다는 논리이다.

내가 데굴데굴 굴렀던 대목은 여기다.
앤의 친구가 집을 비운 사이 한 실내 인테리어업자가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색깔과 크기순으로 재정리해놓았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실내 인테리어업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아무리 양보하고 양보해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몇몇 분들에게 서재를 결혼시키는 노하우를 물었는데, 대부분 '내' 책을 버리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같은 책이 두권 있더라도 (함께 살고 난후엔 이런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일단 내 책을 살리기 위해 꽤 필사적이었다. 나도 가끔은 동생 방에서 슬쩍 자기 책인양 꽂아놓은 내 책 찾기를 하고, 가끔은 나도 동생 책을 슬쩍 내 책들 사이에 꽂아둔다(우리는 거의 자진해서 돌려주는 일이 없다).

<서재 결혼시키기>는 습관적으로 교정을 보시는 어머니(는 신문을 읽다가 틀린 부분을 모아 놓은 것만 350건정도가 되고)나, 긴 단어를 와구와구 먹어치우는 오빠나, 음식점 메뉴판에서 틀린 단어를 찾아 계산할 때 메모를 남겨주시는 아버지와 함께 자란 앤 페디먼의 갖가지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거나, 무서운 독서광의 이야기라기 보단 책을 좋아하고, 책을 가지고 놀줄 알고, 책에 얽힌 추억을 가진 사랑스러운 에세이이다.
Posted by Purs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