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2008. 4. 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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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와인을 사 왔다고 하니까 모두 "왜?"라며 의아해하곤 했다. 그 날씨에서도 포도가 제대로 자라느냐는 걱정과 함께. 심지어 태국의 와인숍에서조차 '그란몬떼'를 달라고 부탁하자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왜 태국 와인을 사느냐는 듯.

하지만 실제로 시도해본다면 선입견은 깨질만하다. 태국식 볶음밥을 만들어놓고는 술을 뭘 꺼낼까 고민하다가 꺼내 들었던 그란몬떼,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2년산이 더 좋다는 얘기들이 있던데, 2003년산도 충분히 괜찮았다. 약간 매콤하면서 몹시 강한 향기로 가득찬 볶음밥과 꽤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와인, 마치 신혼여행을 다시 떠나온 것 같았다.

참고로, 그란몬떼 투어를 가면 아래와 같은 시스템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온도, 습도, 강수량, 일조량 등을 자동으로 측정해 데이터센터에서 정보를 분석한 뒤 올바른 조치를 취하기 위한 시스템인데, 포도 품질을 개선하는 것 외에도 관광객을 위한 기상 안내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그란몬떼 와이너리가 있는 카오 야이 밸리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라 수많은 관광객이 찾기 때문에, 이 와이너리의 기상 시스템이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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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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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이어, 한 달 만에 제주도에 또 다녀왔다. 갈 때마다 제주도가 KT의 CF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혹시 "인터넷에 올리면 주문이 들어와요" 식의 장밋빛 환상이 제주도민들을 사로잡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달 내가 묵었던 펜션에서는 주인아주머니께서 아침마다 창문을 두드려 깨우며 "누룽지가 있는데 드실래요? 된장찌개가 있는데 같이 아침 먹을래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전날 술을 먹었다거나, 아침부터 일정이 바빠 애써 사양했지만 인심은 참 좋았다. 그리고 그 펜션을 떠나는 날, 주인 내외분께서는 직접 집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줬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내 목에 걸린 카메라까지 받아다가 우리 부부를 찍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배경이 이 펜션의 예쁜 전면이었다. (여기 올린 사진에는 빼놓았지만,) 전화번호와 펜션이름이 크게 새겨진 간판이 아주 잘 드러난 상태였다. 인터넷을 타고, 제주여행 후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이 펜션이 알려질 수 있도록 의도한 듯이.

해안도로를 달리다 눈에 뜨인 갈치조림 집에 무작정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을 때였다. 갈치조림은 무척 맛있었고, 쓰러져가는 듯한 낡은 가게 풍경이 성산포 풍광하고 운치있게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잘 먹고 났더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뭘 보고 왔어요?" "그냥 차 몰고 달리다 대충 들어왔는데요?" "아유, 여긴 인터넷이나 신문 보고 많이들 찾아오는 곳인데." 지금 이분들에게는 인터넷 홍보전략이 체화돼 있고, 고객 반응 확인이 생활화 돼 있다. 인터넷 경제가 제주도민 전체에게 경영 마인드라도 심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탓에 좀 어색하고 곤란한 상황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우후죽순 생겨난 수많은 펜션들이 제각기 경쟁적으로 광각렌즈를 사용해가며 예쁜 정원과 벤치, 멀리 떨어진 바다를 보여주다보니 수많은 펜션들이 하나같이 비슷해져 가고, 사진으로볼때면 모두가 똑같아 보인다. 정원이 있고, 꽃이 있고, 바다가 (멀리) 있고. 정말 좋은 곳은 어디인지 궁금해서 입소문이라도 보려고 들면 어김없이 광고성 글만 검색된다. 네이버나 다음에 '제주 펜션'을 쳐보면 키워드 광고만이 우루루 떠올라서 스크롤을 수없이 해야 하고, 모든 펜션들이 서로 '특별히 친절하고, 특별히 예쁘고, 특별히 교통이 편하다'고 자랑해대는 탓에, 오히려 전반적인 불신이 생긴다. 제주도의 펜션 수준은 유럽의 펜션하고 비교하면 호텔급이라고 할 정도인데도, 뭐랄까, 이건 일종의 플라스틱 신드롬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이번 제주도 출장길에서 만난 펜션 주인들은 "1년 동안 열심히 펜션 운영해봐야 기본 비용 빼고, 포털에 내는 검색광고비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대곤 했다. 포털의 키워드 광고에 펜션들이 몰리다보니, 키워드 경매가격은 날로 치솟고, 1년 전에 클릭당 300원~1000원이던 경매가가 요즘은 비싸면 1만원까지 뛴다는 것이다. 100만 원을 광고비로 내놓으면 적어도 1000회 이상 노출되던 광고가 10분의 1도 안 되게 노출 빈도가 줄어들다보니, 실제 비용 지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게다가 인터넷에 발품만 열심히 팔면 각종 할인 및 결합상품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품을 제공하는 곳은 제주여행 관련 카페들. 광고 효과가 떨어지다보니, 이윤을 줄여서라도 실제 구매로 연결시켜준다는 카페 등에 펜션이나 맛집, 렌터카 업체 등에서 열심히 혜택을 주는 것이다.(나부터도 이런 카페를 이용하곤 했다.)

펜션과 식당을 만들고, 그들이 말하는 '육지 사람들'에게 서비스와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은 제주도민들인데, 정작 여기서 이런 상품을 중개하고 큰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제주도민이 아닌 육지 사람들이다.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가 한없이 늘어날 것만 같던 인터넷이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제주가 보여주는 인터넷 경제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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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헤드와 프린스의 새 앨범 가격은 '0'이다. 야후의 '무한대(∞)' 용량 이메일의 가격도 '0'이다. 구글의 전화번호 안내 역시 '0'이고, 컴캐스트가 나눠주는 DVR플레이어의 가격도 '0'이다. 플리커의 저장용량은 무한대를 향해 달려가고, 유튜브의 저장용량도 무한대로 증식한다. 대역폭도 상승해서 Full HD 동영상이 광대역망을 타고 흘러다니기 시작했으니, 대역폭도 무한대를 향해 발전한다. 듀얼코어는 쿼드코어로 발전하는데, 노트북 컴퓨터의 가격은 계속 하락한다. 그러니까, 그동안 시장을 지배해 왔던 복잡한 숫자들은 Freeconomics의 시대를 맞아 '0'과 '∞'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말, 와이어드매거진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롱테일 법칙의 바로 그 사람)이 이코노미스트에 이런 내용의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경제 트렌드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공짜 경제'라는 건 인터넷 산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민해 본 주제였다. 롱테일 법칙만큼 크게 획기적으로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와이어드매거진에 자세하게 소개된 '공짜 경제'에 대한 긴 글을 읽고 나니 혼란만 늘어났다. 저장장치와 대역폭, 프로세서의 처리속도는 점점 빠르게 발전해 가격이 의미없는 수준까지 내려왔다고 하는데, 여전히 인터넷업계에서는 그 대역폭과 저장장치, 프로세서 가격 때문에 비명이다. 앞으로, 언젠가, 의미없어 질 수 있겠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20x240 해상도의 초당 24프레임 동영상을 공급하기 위해 판도라TV와 mn캐스트같은 회사들은 계속해서 적자를 본다. 그런데 여기에 full HD라니. 너무 빨랐다. 내 옆자리 동료는 저 용량이 얼마 되지도 않는 동영상을 보기 위해, 열심히 다른 작업들을 중지하고, 필요없는 인터넷 창을 닫기 시작한다. 쿼드코어 프로세서가 보편화되려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만 지나면 보편화될까? 아닐 것 같다. 크리스 앤더슨이 그리는 공짜경제는 프로세서와 대역폭, 저장공간의 가격이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환경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꿈의 화질'이라고 불렸던 DVD에 5년 만에 싫증을 내고 full HD와 블루레이를 찾는다는 데 있다. 우리의 욕구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발전하는 기술의 가격은 한없이 0으로 수렴할 테지만, 1000만 화소 카메라를 대체하는 1억 화소 카메라가 가까운 미래에 나온다면 그건 또 어쩔 것인가. 기술 발전의 속도가 예측을 뛰어넘을만큼 빠르다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는 늘 기술 발전의 속도보다 한 걸음 정도 빠르게 마련이다.

공짜 경제 시대의 중요한 자원인 '관심(attention)'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변수다. 세상에서 만인에게 평등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다만, 4억 명이 24시간을 갖고 있는 미국 같은 나라와 4000만 명이 24시간을 갖고 있는 한국 같은 나라 사이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게다가 적어도 웹의 세계에서만큼은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시장은 아직은 한국에만 제한돼 있다. 통일이 된다거나, 자동번역기의 성능이 높아져서 일본과 한국이 웹 시장을 일부 공유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 시장은 제한적이다. '완전경쟁'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거대 시장에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미국 기업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독과점이 이슈가 되는 제한된 시장에서 머리를 싸매고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에겐 '공짜 경제'를 지탱시키는 '관심이라는 자원'이 지나치게 부족하다. 크리스 앤더슨의 공짜 경제에 대한 희망찬 장밋빛 전망은, 적어도 한국에선 아주 먼 훗날의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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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현실은 허구보다 강력하다. 그리고 너무 기가 막혀서 우스꽝스럽다."
- 이명세

숭례문이 불에 타서 무너질 때, 놀란 가슴.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야구선수가 네 모녀 살해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뒤 자살했을 때, 뒷얘기를 상상해내는 머리.

현실은 허구보다 강력하다. 허구는 기껏해야 밀리언셀러가 되고, 천만이 넘게 즐기는 오락거리가 될 뿐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사천만의 화제에 오르내린다. 이명세가 위의 말을 했던 것이 아마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찍고 나서 또는 찍던 중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명세는 훔치고 싶었던 것이다. 허구가 넘볼 수 없는 현실의 아우라를. 그래서 강력계 형사들과 수십일을 함께 보내며 취재를 했던 것이겠지. 범인 잡으러 뛰쳐들어가기 전 골목길에 나란히 늘어서서 소변을 보는 리얼리티가, 내게는 그런 노력의 결과로 보였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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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여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욕망과 그의  리듬을 존중하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 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줄 아는 것. 그리고 전혀 자만하지 않고 전혀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단순한 자유다. 그것은 매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중에서

알튀세르는 공부밖에는 그다지 잘하는 게 없는데다, 정신병까지 앓고 있었던 것 치고는 꽤 '근사하게 우울한' 아우라를 풍겼는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쓴 철학서만큼이나 무척 난해해서 제 친구는 '짜증은 오래 지속된다'라고까지 혹평하기도 했던 그의 자서전에는 위와 같은 글귀가 나오죠. 그가 지켜내고자했던 맑스의 유물론과 그에서 파생된 후기구조주의와 비교되던 사유보다는, 솔직히,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철학자였다는 사실이 더 멋집니다.

매순간의 빛이 곧 하나의 선물입니다. 일상을 사랑할 줄 알게 됐다면, 그것이 사랑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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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는 책이 어렵다면 그 작가는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는 본질적으로 실패한 작가라 본다... 책은 읽기 힘들어서는 안 되며, 행복도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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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세요. 당신 글을 보면서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보르헤스가 어렵다면, 아마도 주석으로 가득찬 번역서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쉽고, 반짝거리며, 즐거운 책이다. 보르헤스의 책은.

행복도 마찬가지다. 노력을 요구하지 않고도 손에 와 닿아 줘야 행복이라는 것은 맞지만, 손에 닿는 것에 주석이 좀 붙어있다고 해서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눈길 한번 돌리는 것을 대단한 '노력'이라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실패한 행복 이전에 자신의 문제 아닐까.

보르헤스는 늘 그렇다. 맞으면서 틀리고, 해석이 되면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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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유혹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필요했다. 즉 내가 남자에게 개방적인 여자라는 것과 아무에게나 개방적이지는 않다는 것. 나는 여러 남자친구 얘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아 내가 부담 없는 상대임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진정 이해 받을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냄으로써 허점을 보이고 곁을 내놓는 한편 간간이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도덕적 규범에 대해 탄식하기도 했다. 현석이 자세를 바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를 유혹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예요' 하는 암시이다. 지적인 남자는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당연하고 옳은 말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함 말만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반드시 칭찬을 하되 상투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논리에 어긋나도 상관없다. 남과 달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가 너무나 많이 들었을 용모에 대한 호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오직 지성에 대한 감탄만을 늘어놓은 것은 내가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이었다. 물려받은 아름다운 용모는 기정 사실이라 치고, 제 스스로 도달한 지성에 대해 더 많은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은 지적인 남자의 당연한 허영심이었다. 여러 가지 인문적 교양을 동원하여 그의 고상한 화제에 성심껏 응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언제쯤 취해버린 척하며 그로부터 남자로서의 행동을 유발할 수 있을까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를 유혹하는 세 번째 단계는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하는 자기 암시이다. 그 암시를 스스로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려면 손을 잡는다거나 포옹한다거나 하는 가시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날은 윤선, 경애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혼자 그 술집에 들어와 있다가 현석을 만난 것이다. 경애에게 못 간다는 전화를 걸러 갈 때만 빼고 나는 드물게도 오로지 현석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만으로 유혹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을 보여 곁에 오게 한 다음 특별한 호감을 표시함으로써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러고는 행동의 증표를 남기게 하는 것, 이런 따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유혹의 방법이다. 그것이 결정적 기회인가 한갓 해프닝인가는 오로지 행운이 결정한다. 술집 계단에서 나는 걸음이 비틀거려 두 번이나 난간을 붙잡았다. 그는 예상대로 약간 망설이다가 내 어깨를 안았다. "내 팔 잡아요." 그러나 나는 짐짓 그의 팔을 풀며 "괜찮아요. 별로 안 취했어요" 하면서 불안한 몸짓으로 다시 난간을 더듬어 잡았다. 그러고는 그가 머쓱해져서 방심하고 있을 때 계단 중간쯤에서 재빨리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의 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기화로 나는 적절한 때 행동을 끊고 다시 앞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내 앞에 택시가 한 대 와서 멎었다. 나는 지체 없이 택시를 향해 다가갔다. 뒤따라온 현석이 내 팔을 붙잡았다. 뜻밖에도 손아귀 힘이 세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기의 순간적인 과격함을 변명하듯이 순순히 팔을 놓으며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붙잡았다는듯이 "조심해 가세요" 하고 인사치레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며 쏘는 듯한 눈빛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그가 내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택시가 그냥 출발하려 했으므로 급히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춘 것은 '오늘 밤'이라는 긴 문장에 찍은 마침부호이다. 나는 알쏭달쏭한 말없음표나 물음표, 평이한 마침표가 아닌 강력하고 짧은 느낌표를 찍은 것이다. 마침부호는 다음 문장의 향방을 결정짓는 강력한 표현이 되기도 한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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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옛 파일을 정리하던 중 '비망록'이라고 적어놓은 hwp 파일이 눈에 띄었다. 과연, 내 별로 대단할 것 없고, 심지어 길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삶에 '잊지 말아야 할 기록'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 기록들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놓은 단상들 가운데 대부분은 길지 않은 인용이지만, 굳이 이 은희경의 소설책 한 귀퉁이를 그대로 받아쳐넣은 긴 인용부터 옮겨 적기 시작한 것은 이 부분이 내 머릿속 한 부분을 점화시켰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시동키를 돌려 스타트모터가 돌아가고, 엔진의 점화플러그에 불꽃이 튀며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행정이 시작되는 그 느낌. 머릿속 잠자고 있던 두뇌의 한 부분이 시동을 걸고 먼지를 털며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은희경의 글을 읽고 있자면, 수줍어진다. 얼굴이 약간 발그레해지기도 하고. 그녀의 글은 읽어야만 하도록 만드는 의무감을 자아낸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8. 2. 17. 23:07

"예, 우린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들에겐 몹시 쉽고, 몹시 단순하며, 몹시 절실하다.
오바마의 선거 캠페인은 선거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화'나 '희망'과 같은 단어들은 대통령 선거와 같은 대형 행사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진부한 단어인데도, 오바마가 얘기하면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건 그의 삶 덕분이고, 그의 연설 덕분이며, 어쩌면 그의 외모와 목소리 덕분이다.

이미지 정치에 현혹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곤 하지만, 사실 매스미디어 시대의 유권자는 나를 포함해 모두 이미지 정치에 현혹되게 마련이다. 이미지에서 자유로운 자는 없다. 문국현이 권영길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하는 이유나, 이명박이 절대적인 지지로 당선이 되는 이유야말로 이미지 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도, 오바마가 비록 워렌 하딩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미지 선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몹시도 부러울 뿐이다. 스칼렛 조핸슨, 윌.i.am., 허비 행콕이 변화와 희망을 자신들의 후보와 함께 노래하는 이미지 선거를 보면서, 반대편에 있던 우리가 생각났다. 기껏해야 욕쟁이 할머니를 봤을 뿐이었고,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의 최대치였으며, 유권자의 절반이 선택해야 하는 이미지의 최선이었던 우리가.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8. 2. 11. 18:48

찌개를 끓였다.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차가워진 나물을 꺼내 갓 데운 밥과 함께 비볐다. 숟가락을 집어 넣고 휘적휘적. 고추장을 좀 넣고 휘적휘적. 그리고는 입에 밥을 집어넣고 삼켰다. 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또 다시 삼켰다. 그렇게 한 10여 분. 탁탁, 빈 그릇을 모으고, 턱턱, 반찬그릇에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었다. 쩔그럭대며 빈 그릇을 씻었고, 쏴 흐르는 물줄기에 비누거품 가득한 접시들을 닦았다.

TV를 켜고, 뉴스를 보고, 조폭마누라3편을 틀어놓고, 맥주를 한 캔 꺼냈다. 아차. 일요일 저녁. 한 주 동안 모아 놓은 재활용 쓰레기를 꺼내 들고는 분리수거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아래쪽 화살표를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 찬 공기 사이로 입김을 하얗게 그어대며 전진. 그리고 분리수거. 캔은 캔 자리에, 비닐봉지는 비닐봉지 자리에, 종이는 종이 자리에. 늘 고민되는 순간은, 비닐과 플라스틱의 경계가 모호한 제품들이다. 또는 플라스틱과 종이의 경계가 모호한 제품들이다. 어찌됐든 대충 정리한 뒤 다시 올라가는 쪽 화살표.

아주 오랫동안 읽고 있는 700쪽짜리 두꺼운 소설책을 또다시 꺼내든다. 잠이 오지 않는다. 11시30분, 40분, 50분, 59분, 59분 30초, 59분 59초...자정이 넘어서 버렸다. 하루가 지나갔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우리가 결혼한지 100일. 그녀는 출장을 떠났고, 그녀가 없는 퀸사이즈 침대는 무척이나 넓다. 단지 이틀밤 뿐인데, 휴대전화 통화조차 할 수가 없어 몹시도 허전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숙해짐을 넘어 그녀는 내 일부가 됐다. 혼자 보낸 100일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더 그녀를 그리워했다.

Posted by 흰솔


무슨 생각인걸까. KBO가 현대 유니콘스를 명목상 해체하고, 제8구단을 명목상 창단하며 실질적으로 현대를 팔아 넘기는 계약을 정체 불명의 투자회사인 센테니얼이라는 곳과 체결했다고 한다.

우선, 유니콘스의 (실질적인 매각) 금액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센테니얼이 (명목상의) 서울 연고 구단 창단을 위해 지급하기로 한 돈은 120억 원. 하지만 이전에 인수 의사를 밝히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직전까지 갔던 KT가 밝혔던 (명목상의 창단 또는 실질적인 인수) 가격은 60억 원이었다. 불과 1, 2개월 남짓한 사이에 값이 두 배로 뛰었다. 현대가 그동안 가치가 두 배 높아졌을까? 아니다. 현대가 '수원' 연고지로 현재의 유니콘스를 태평양으로부터 인수했을 때 냈던 돈이 430억 원이었는데, 그걸 KT가 60억 원에 인수하기로 한 것이 적정한 시장 가격이다.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120억 원을 선뜻 내겠다고 달려들었다. 조건을 봐야한다. 아니나 다를까, 센테니얼은 120억 원을 2차례에 나눠 내는 옵션을 계약에 넣었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센테니얼이 야구단 사업을 정상적으로 벌일 것으로 KBO가 기대했다면,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 없다. 뭐, 그 정도로 KBO가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시장 가격에 구단을 넘기려고 했더니 각종 비시장적인 요소들이 끼어들었고, 제대로 계약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렸을 가능성이 높다. KT가 적정가격을 써내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계약을 철회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느 기업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복마전에 끼어들겠다고 나설까? 아마, 센테니얼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자회사의 생리를 봐야 한다. 나는 기억한다. 뉴브리지 캐피탈이 부실투성이의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하면서 "뉴브리지는 하나로텔레콤을 시세차익을 노리고 인수한 것이 아니다. IP TV라는 새로운 사업영역과 초고속인터넷이라는 훌륭한 자산을 믿고 제대로 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인수한 것이다. 단기간에 하나로텔레콤을 되파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게 언제냐고? 2006년 초의 일이다. 2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새 하나로텔레콤은 SK텔레콤에 팔렸고, 여전히 부실투성이에 미래도 불확실한 IP TV 사업모델 하나를 위해, 하나로텔레콤의 모든 투자 기회를 포기하고 IP TV에 몰빵하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여 인지도를 높인 게 경영의 전부였다. 하나로텔레콤은 정상적으로 통신 사업을 한 적이 없다. IP TV라는 트렌디한 사업에 자원을 '몰빵'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회사를 샀다 팔았을 뿐인데도, 뉴브리지는 그 과정에서 단기간에 수배의 이익을 챙겼다. 왜? 어차피, 유선통신망회사는 SK텔레콤이든, LG통신그룹이든, KT통신그룹이든 탐낼 수밖에 없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투명하니 위험부담을 지기 싫어서 대기업이 투자를 꺼릴 때, 투자회사는 과감하게 도박을 건다. 그리고 크게 먹으면 먹고, 망하면 망한다. 대신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절대로 투자회사가 인수 기업의 사업을 주력으로 벌이지는 않는다. 그저, 분칠을 할 뿐이다.

센테니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최고 스포츠는 야구다. 흥행 성적으로, 관중 동원력으로,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원활한 리그 운영의 필수조건인 제8구단이 사실상 해체 위기에 몰렸다. 시장 가치는 KT의 경우에서 살펴보니 60억 원에 불과하다. 이러저런 '정서법'을 만족시켜줘봐야 100억 원 내외에 해결이 가능하다. 문제는 되파는 가격이다. 여기에 '분칠'의 필요성이 생긴다. 센테니얼은 앞으로 그 분칠을 '네이밍 스폰서 유치'라는 실험으로 해낼 것이다. 계약 금액은 비밀로 한 채, 네이밍 스폰서가 사업성이 있다는 식의 홍보를 하는데 열을 올릴 테고, 이 과정에서 아무도 모른다는 톱클래스 연예인의 광고료처럼 각종 거품이 끼어들기 시작할 테다. 자연스럽게 사업모델을 자산 삼아 재매각 가격도 뻥튀기가 될 것은 틀림이 없다. 센테니얼로서는, 그저, 기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비용이 조금 들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선수 관리와 경기 성적 등에 대한 '책임'은 단장이 맡고, 스탭 구조조정이나, 비용 효율화 등의 '칼'은 센테니얼 사장이 휘두르는 구조의 운영이 예정돼 있다. 방만 경영의 대표주자였던 현대 유니콘스는 몇 군데 손만 도 상당한 예산을 줄일 수 있을 게 뻔하다. 거기에 네이밍 스폰서까지 '저가에라도' 모집하면, 연간 소요 비용의 상당액을 외부 자금으로 돌릴 수 있다. 땅짚고 헤엄치기에 가까운 것이다. 원활한 통신사업의 필수요건인 유선통신망을 갖고 있는데, 시장가치는 형편없었던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한 뒤, 하나TV 사업으로 투자자를 설득하고, 연간 들어가는 비용은 광고료와 정책자금으로 돌려댔던 뉴브리지의 경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게다가 센테니얼은 리스크도 적다. 겨우 120억 원을 두 차례에 걸쳐 나눠서 낼 뿐이다. 자본금 5000만 원 짜리 소규모 창투사라서, 하다가 수가 영 틀리면, 회사 문을 닫겠다고 협박도 해볼 수 있다. 그건 센테니얼의 마지막 카드다. 국내 프로야구 시장에 대한 일말의 책임도 느낄 이유가 없는 일개 창투사가, 구단 문을 닫겠다며 배를 쨀 때, 가슴 아플 당사자는 KBO이고, 열이 나는 사람은 야구팬들일 뿐이다. 5년 의무 보유기간이 지나기 전에 문제가 생기면 땡깡을 부리면 되고, 문제가 없다면, 제값을 받고 팔면 된다. 한국 야구단의 가격은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할 때 400억 원이 넘었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100억 원도 안 된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서고, 3만 달러를 향할 때 가장 성장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은 야구단 값이 사실상 바닥에 이른 상황이라고 봐도 된다. 더욱이 센테니얼로서는 구단을 잘 운영하면 가치가 올라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고, 구단을 잘 못 운영하면 외국계 자본에라도 국내 야구단을 넘길 수 있으며, 판매 시점이 된다면 그 때는 메이저리그 야구단처럼 국내 야구단도 컨소시엄 투자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방법은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일단 창투사에 판 선례까지 있는데, 못할 것이 없다.

문제는 누가 만들었을까? 단연 KBO다. 그들은 무엇보다 시장 질서를 헤쳤다. 게임의 룰을 깬 자들에게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인수 의사를 밝혔고, 계약 직전까지 갔던 KT만 바보로 만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계약까지 못 간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적은 가입금' 때문이라고 한다. 시장에서 팔리는 가격에 판매를 계약했다가, 물건을 넘기기 직전에 도로 뺏고 더 비싼 돈을 내라는 심보는, 기본적으로 상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건 시장이 아니라 깡패 놀음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KT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합리적인 기업이 투자를 해보겠다고 나서겠나. 애당초, 국내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KBO가 막아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KBO는 현대 문제를 '미봉'했다. 뉴브리지 얘기를 앞에서 했듯, 센테니얼은 '땡깡'을 부려서 단기간에 현대를 팔든, 5년의 기간을 채우고 팔든, 현대를 매각할 것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때의 가격은 60억 원도, 120억 원도 훨씬 넘어서는 가격이 될 것이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7개로는 부족하고, 8개를 넘어서기에는 능력이 안되는 대한민국 야구판을 생각하면, 인수기업은 나오게 마련이다. 그 때가 되면, KT가 샀더라면, 그 차액의 일부를 야구단에 투자했을 텐데, 5년 간 센테니얼이 잇속만 차렸다는 비판에 대해 지금의 KBO 결정권자들은 어떤 변명을 해댈까. 5년 뒤면 그들은 모두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건가?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