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에 해당되는 글 127건

  1. 2007.07.29 준비~ 땅! 2
  2. 2007.07.11 국수 먹는 날
  3. 2007.07.05 토끼머리의 양대리스토리
  4. 2007.07.05 평창 1
  5. 2007.07.04 점심 약속 1
  6. 2007.07.03 자유 네덜란드의 쓸쓸한 퇴장 1
  7. 2007.06.27 최모 씨, 배우 되다. 6
  8. 2007.06.27 저승길 노잣돈 1
  9. 2007.06.27 그립이 굵었나
  10. 2007.06.26 addicted to the printed 3
토끼머리2007. 7. 29. 07:17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일 치고 쉬운 걸 못 봤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고3 수험생 시절이나 군대 입대할 때, 입사 원서를 넣고 한없이 기다리던 때 정도였던 것 같다.

요즘 다시 이런 얘기를 부쩍 듣고 있다. 이번에 다가온 대사(大事)는 결혼. 그냥 맘이 맞는 남녀가 함께 살면 되는 간단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 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각오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경쓸 일은 생각보다 많더라.

그래도, 남들도 다 하는 일 치고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일은 없더라. 고3 시절도 무사히 넘겼고, 군대생활도 나름 즐겁게 보내고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왔다. 입사를 편히 잘 했던 것도 물론이다. 결혼도 그렇게 무리없이 잘 치뤄지고, 좋은 기억이 되며, 고생스러워 기억에 소중하게 간직되는 일이 되겠지. 사실, 가슴이 두근거릴 일이니까.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7. 11. 00:29
012
  손놀림은 어색했고, 식탁은 지저분했다. 하지만 손님들은 군말 없이 긴 줄을 섰다.
  중년을 한참 넘긴 나이의 여성들이 교대로 식탁을 닦으며, 분주히 국수를 그릇에 말아 담아냈다. 하지만 밀려드는 손님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서 오후 2시로 잡은 실습 시간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의 안양역 앞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줄은 식사시간 만큼이나 길었다. 오후 4시까지의 실습 시간 동안 이들이 판매한 국수는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1000원이니 20만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셈이다.
  이제 일이 손에 익숙해지면 두 명 내지는 혼자서도 한 시간에 100그릇 이상을 팔 수 있다고 했다. 문정자 씨는 꿈에 부풀었다. 가게를 정리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보통 크기의 밥숟가락에 반 수저가 안 되게 담은 커피. 설탕은 커피와 같은 양을 넣었고, 크림은 넣지 않았다. 그녀의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였다.
  2주 전, 문 씨는 경기 송탄시의 한 골방집에서 이렇게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를 타고 있었다. 천주교 수원교구청이 만든 자원봉사단체 ‘한마음’의 사업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사업설명회라야 동네 기지촌 여성들 몇 명을 모아두고 새 봉사활동을 설명하는 활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온 얘기는 솔깃했다. 한마음에서 돈을 엄청나게 싸게 빌려주고 가게 창업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한마음이 내건 사업 아이템은 ‘국수’.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좋은 길목에 국수집을 내고 1000원짜리 국수를 파는 일이다.
  가게를 내는 데 필요한 돈은 약 3000만 원. 이 돈을 기지촌의 여성들에게 연 1%의 이율로 10년 동안 빌려주기로 했다. 장사가 실패하지 않도록 창업컨설팅 회사에서 가게 터를 알아봐주고 국수 만드는 법까지 가르쳐 주는 조건이었다. 거짓말 같았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국수가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맘에 들었다. 고작해야 국물을 미리 내놓은 뒤 면만 덜어 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탁탁 데쳐서 그릇에 부어주고 고명을 올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본금을 대준다지 않는가.
  보아하니 함께 앉아 있던 여자들이 전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경쟁에서 뒤져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서로가 “그거 내가 할게”라고 앞다퉈 손을 들었다.
  모두가 쉽게 돈을 벌고, 쉽게 돈을 쓰던 신세들이었다. 젊었을 땐 그랬다. 이렇게 벌기 힘든 줄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쓰지도 않는 거였는데.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의 그네들에겐 일자리조차 없었다. 오직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줄 이유가 없었다. 한마음에서는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검은 사제복 차림의 신부가 왕 언니네 집에 들어섰다. 그는 면접관이었다.
  그날 참가한 여성들은 모두 5명. 신부는 이 가운데 3명을 먼저 뽑아 공동 명의의 가게를 내 주겠다고 했다. 1명에게만 돈을 빌려주면 가게를 정리해 도망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부는 이런 사업을 ‘마이크로 크레디트’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에게 낮은 이자로 소액을 대출해주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란 것이다.
  현재 전국 규모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벌이는 곳은 사회연대은행과 신나는조합, 아름다운재단의 아름다운기금 등 3곳.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 단위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도 생겨나고 있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돈을 직접 지원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재활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의 ‘사회복지은행’과 강원도 원주밥상공동체의 ‘신나는 은행’, 대구·경북 지역의 ‘작은 은행’ 등이 대표적인 지역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이다. 한마음의 마이크로 크레디트도 이런 곳들처럼 경기 남부 지역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으로 시작됐다.
  면접을 마친 문 씨는 다른 지원자들을 떠봤다. 자신의 ‘합격 가능성’을 예상해본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포기할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강 씨는 “딸이 혼혈인데 사춘기를 무사하게 넘겨줬어요. 그것만도 기특하고 고마운데 올해에는 4년제 대학에 입학까지 했어요.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지만, 어미가 적어도 용돈이라도 벌어줘야죠. 저, 아침엔 신문 돌리고, 주말에는 일당 2만 원 받고 전단지 돌려요. 이젠 일만 있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에요”라며 도무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콩팥을 떼어내는 수술까지 했다는 장 씨는 척 보기에도 약해 보였다. 과연 국수 마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문 씨가 되려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말했다. “평생 모았던 돈, 3년 전에 왼쪽 콩팥 떼어내느라 다 날렸어. 우리가 원래 보험이란 걸 모르고 살았잖아. 그러다보니 병원 갔더니 수술비가 수백만 원이 넘게 나오데. 이렇겐 살 수가 없겠더라고. 힘은 좀 들어도 국수 정도는 말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하루에 꼬박 4만 원 버는 호떡 포장마차를 끄는데, 손해만 보고 있어.”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5년을 살아왔던 집을 땅 주인에게 빼앗기게 생겼다는 이 씨,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늙은 에미가 돈이 없어 늙고나니 자식 찾는다' 소리를 듣기 싫어 꼭 일을 해야 한다는 최 씨. 포기해도 되는 이유라는 건 누구에게도 없었다. 문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나이 들어 미군들이 싫어한다며 평생을 일해왔던 '홀'에서조차 쫓겨났다. 한 때는 그 홀에서 웃음과 술을 파는 자신은 공주였는데도.
  결국 이들은 국수를 만들고, 직접 팔아보는 실습에 들어갔다. 첫 가게가 3개월을 버티면, 2호점도 3호점도 낼 예정이다.
  지난주 토요일은 첫 실습을 하는 날이었다. 한국인은 축하할 일이 있는 날이면 국수를 먹곤 한다. 그래서 이들이 창업할 가게의 이름은 ‘국수 먹는 날’이다.

-------------

  벌써 석 달 전에 써놓은 글. 이제야 올리게 된다. 뭘 망설였던 걸까. 그새 연합뉴스에는 이들의 성공스토리가 보도됐다. 시작 당시와는 많은 게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단지 바빴다는 이유로, 관심을 갖기 쉽지 않았다. 늘 바쁘게 마련인데, 가끔,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과연 무엇일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다. 넌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냐고.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7. 5. 14:07

덕아웃스토리를 책으로 펴낸 양대리(왼쪽)와 1회 주인공이었던 LG트윈스 서용빈 코치

사람은 늘 친구를 존경하고 배우며 살아야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친구를 존경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또래로 같은 경험을 겪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친구란 대개 책 속에나 존재한다. 친구란 그저 서로 같이 늙어가고, 같이 신세한탄을 하며, 때로는 질투하는 대상 정도가 되는 게 흔한 일이다.

양대리를 만난 건 사회에 나와서. 처음 만났을 때 이 녀석은 대리도 아니었다. 그냥 사원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대뜸 같이 나이트클럽에 가자, 물 좋은 데 잘 안다, 이런 소리나 하는 거다. 또 대리가 빨리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있었다. 난 이 녀석을 출세 지향적인 인간으로만 생각했다. 돈 많이 벌 궁리, 빨리 승진할 궁리, 성공해서 남들 앞에서 보란듯 떵떵거릴 궁리만 하는 놈으로 봤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런 얘길 입밖에 내놓는 또래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또래 직장인들은 하나같이 패배주의자다. 속으로는 야심이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입으로는 그렇다. 이들은 모두가 로또로 한 몫 잡아서 일찍 은퇴할 생각이나 하고, 회사는 가늘고 길게 다니는 공기업이나 공무원 생활 등을 선호하면서도, 남이 잘 되는 걸 보면 배가 아파 견딜 줄을 모른다.

양대리는 만날수록 달랐다. 회사에서 튀고 싶어했고, 자기가 훌륭한 인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노력이 회사의 성과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다. 무사안일하게 하루하루 사는 대신, '사원 따위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큰소리치며 새로운 일들을 제안했고,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자기는 12시간 일하면서 남들 하는 일도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했다. 출세하고 싶다는 얘기를 끊임없이 떠들어댔기 때문에 자기가 뱉은 말이 부끄러워서라도 '책임질 수 있는 지위'에 올라가려고 노력했고, '가늘고 긴' 직장 따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남들이 잘 되면 자기도 그렇게 되려고 그 사람들을 찾아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질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그냥 좋은 샐러리맨일 뿐이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니 흔히 봐야 하는. 하지만 요즘 이런 샐러리맨은 없다. 가끔 이 녀석을 볼 때마다 난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과 같은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신화적 성공을 각인시키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아마 그들도 젊을 때 양대리같지 않았을까. 그래서, 친구지만 이 녀석이 존경스럽다.

뭐, 그렇다고 이 녀석이 신화적인 인물은 아니다. 자기자랑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녀석인지라,신문에 제 기사가 실리자마자 재깍 알려왔다. 그동안 열심히 선수들 꼬드기고, LG트윈스 프론트를 꼬드기고, 전광판 기사들에게 통닭 접대하며, 아나운서 언니들에게 알랑거려 만들어 낸 '덕아웃스토리'라는 만화가 조그만 만화책으로 출판된 거다. 첫 날, 잠실구장 매점에서만 100권을 팔았다고 자랑했다. 한 권에 2000원이니 겨우 20만 원 번 셈이지만, 이 녀석은 그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난 야구를 잘 모른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하지만 이 만화를 보면서 서용빈을 알게 됐고, 최길성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LG 선수들이 내가 아는 현역 프로야구선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TV에 야구중계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LG를 응원하게 됐다. 그건 모두 양대리 덕이다.

이 만화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옆에서 지켜봤다. 내가 해준 거라곤, 좋은 생각이다, 열심히 해라, 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지만, 막막했던 일을 이 녀석은 하나씩 현실로 해나갔다. 제일 중요한 건 만화가였다. 양대리는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릴 줄은 더더욱 모른다. 오로지 선수들과 부대끼며 쌓인 '이야기'가 이 녀석의 전 재산이었다. 그래서 만화가를 찾아갔더니 찬밥취급만 당했다. "네가 만화 시나리오가 뭔지나 알아?"라는 조소부터, "쓰려면 편 당 100만 원은 줘야지"라는 콧대형까지 유형도 다양했다. 예산은 없었다. 편 당 100만 원 씩 '대리의 꿈'에 쏟아부어줄 회사는 LG스포츠가 아니라 어디라도 없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공주대 만화창작학과. 그곳 지도교수를 만나고 돌아와서 양대리는 또 자랑 보따리를 쏟아놨다. "아, 내가 돈이 없잖아.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수님께 '돈은 못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교수님과 제가 산학협동의 훌륭한 성과물을 하나 만들어 보시죠'라고 말씀드렸지. 다행히 고개 끄덕여 주시더라. 생각해 봐, 이 만화 대박나면 정말 그 학생들에게도 산학협동의 모범사례가 되고, 이익도 돌아간다고."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만화를 처음 시작하면서 대박날 꿈만 꾸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결국 만화는 성공했다. 학생들에게도 좋은 커리어가 됐을 것 같다.

어찌어찌 만화가는 구했는데, 그 다음은 전광판이 문제였다. 홈페이지에서만 보여주는 건 이 녀석 성에 차지 않았던 거다. 프론트를 찾아가 빌고 설득하고 조른 끝에 홈경기에서는 5회가 끝나고 구장 정리 타임에 이 만화를 틀기로 했다. 문제는 전광판 기사님들. 양대리가 "음악과 싱크로가 잘 맞아야 해요. 이거 제가 사인 보내면 정확히 트셔야 합니다." 등등의 까다로운 주문을 해대니 갑자기 일거리가 늘어난 분들이 맘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양대리는 통닭과 콜라를 사들고 홈경기 전날 전광판 기사들을 찾아가, 예행연습까지 하고야 말았다. 아나운서들도 찾아가 마지막 멘트를 감동적으로 읽어달라고 수없이 부탁했다.

별 일들이 많았다. 이 녀석은 뭔가 뒤틀릴 때마다 소주나 하자고 날 불러내 놓고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왜 이리 안티는 생기고, 고까워하는 사람은 많고, 신경쓸 것 많아서 그만 그리련다"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별 얘기도 안 하고 술만 마시고 있으면, 혼자 알아서 "그래도 재밌지? 팬들이 찾던데, 계속 해야겠지?" 이러는 거다. 여기서 한두 마디만 맞장구쳐주면 술기운도 올랐겠다, 기분도 좋아졌겠다, 다시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헤어지곤 했다. 그리고 만화는 계속 올라왔다.

세상은 긍정적인 양(+)의 에너지와 부정적인 음(-)의 에너지가 조화를 이뤄 구성돼 있다. 양대리는 -100~+100까지로 구분되는 이 세상의 에너지원들 가운데 +90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슈퍼 전지다. 수많은 - 전지들 때문에 세상이 짜증나는 사람들에게 양대리는 +의 에너지를 선물한다. 친구를 존경한다는 기분을 가끔씩 느낄 수 있다는 건, 내 인생에도 축복이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7. 5. 11:32

by youngdoo (www.flickr.com/photos/youngdoo/)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준비기간을 보면서 이젠 도시 하나가 달려들어서 세계와 경쟁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구나, 하는 감탄도 같이 들었다. 평창은 소치와 잘즈부르크를 유치전 내내 시종일관 압도했다. 마지막 프레젠테이션까지 훌륭한 인상을 심어줬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물론 대통령과 한국 최대 기업 총수가 직접 해당 도시로 날아가 총력 외교를 펼쳤고, 각계각층에서 물밑 지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서울 올림픽이 아니라 평창 올림픽이었던 거다. 또 개발독재 때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됐던 행사도 아니고, 철저하게 각 주체가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따져 만들어낸 합리적 이해관계의 총합이었다. 그 과정이 그렇게 많이 무리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정당했다는 건 감탄스러울 일이 아닌가 싶다.

평창 사람들은 아쉽겠지만, 지금까지의 과정 만으로도 평창은 많이 발전하고,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번 놀러가봐야겠다.

그나저나, 이번 결선투표에선 잘즈부르크 표가 평창에게 올 거라더니, 막판에 고무신 바꿔 신은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Posted by 흰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에 테니스 레슨을 받고 나오면, 몹시 배가 고프다. 아침부터 땀을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기분을 이용해 평소보다 더 과식을 할까봐 오히려 아침은 살살 먹게 된다. 그러다보니 점심 식사 시간은 무척 기다려지게 마련이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팠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나의 점심 시간을.

그런데, 매너없는 상대방이 점심 약속을 해놓고서는 약속시간 5분 전에 전화를 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못 나가겠는데요, 대신 저희 팀에 다른 사람을 보낼게요."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약속을 여러번 변경해가면서 이날 점심 약속을 잡았던 거냐? 월요일에도 당신이 개인 사정이 있다면서 약속 미루지 않았던가? 만나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미리 약속을 취소하든지. 다시 전화만 했단 봐라. 내 점심은 그래서 결국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 에스프레소와 오뜨 한조각으로 축소됐다. 고등어 조림을 먹을까, 김치찌개를 먹을까 고민하던 아침의 나는 오간데 없고. 젠장, 젠장, 젠장.

사진 속 몹시도 배고파 라켓까지 씹어먹을 듯 보이는 저 헝그리 테니스 선수는 고란 이바니세비치(Goran Ivanišević). 이바니세비치는 2001년 윔블던에 30살의 나이로 출전한다. 한 때는 193cm의 장신에서 나오는 200km가 넘는 강서브로 세계랭킹 2위까지 올랐던 무시무시한 선수였지만, 이미 이 때는 옛날 얘기가 됐을 때다. 노장, 퇴물 소리를 들으며 125위의 랭킹으로 와일드카드 자격을 받아 윔블던에 간신히 입장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가 코트에 서고 나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결승까지 승승장구하며 올라간 이바니세비치는 호주의 패트릭 라프터를 세트스코어 3대2의 접전 끝에 꺾고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다. 그랜드슬램에 올라설 때마다 그의 앞에는 늘 애거시나 샘프라스가 있었고, 그는 13년 동안 번번히 지기만 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첫 우승, 와일드카드 선수의 첫 우승 등 각종 신기록을 세우며 결국 노장 투혼을 불사르고 만다. 그런 그도, 아마, 배가 고프면 투혼이고 뭐고 없었을 테다. 라켓 씹어먹는 것 좀 봐라. 젠장. 점심약속을 취소하려면 좀 매너있게 1시간 전에는 취소하시라고!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7. 3. 18:3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암스테르담의 홍등가

그곳에 가면 마리화나도 마음대로 필 수 있었고, 낙태와 안락사가 합법이었으며, 매춘과 동성간 결혼도 자유로웠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에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줄로만 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옛날 얘기가 된 모양이다. 요즘 네덜란드는 달라졌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의 네덜란드 기사를 보면 그동안 낙태를 하겠다고 네덜란드로 국경을 넘어오는 유럽인들과, 동성 결혼 신고를 하겠다며 네덜란드로 찾아온 동성애자들로 인해 네덜란드는 최근 십수년 간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국제 범죄조직은 네덜란드에서 세계인들을 상대로 마리화나 장사를 벌였고, 한 때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합법화했던 매춘은 21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을 상품화하는 도구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네덜란드에서 보수주의의 기운이 일어난 건 이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결국 전후 처음으로 기독교 정당을 정계에 진출시켰고, 그동안의 자유로움에는 조금씩 고삐가 조여들어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네덜란드 정계 일각에서는 마리화나와 낙태, 동성 결혼 등의 급진적인 조치를 네덜란드인에게만 허용하고 외국인에게는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 중이다.

분석은 여러가지였다. 무엇보다 자유가 지나쳐 통제 불가능의 지경이 되자 이제 네덜란드가 범죄를 끌어들이는 장소로 전락했다는 현실적인 우려가 컸다. 또 늘어나는 흑인, 아랍계 등의 이민 인구 틈에서 백인 순혈주의자들이 위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어찌됐든, 네덜란드의 변화는 아쉽기만 하다. 가 본 적은 없어도, 내 머리속의 네덜란드는 자유주의 정신으로 충만한 나라였다. 상인에게 부여했던 돈 벌 자유는 타인에게도 관용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그래서 마약과 동성애를 인정했다.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똑같이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미국에서는 겉으로는 자유를 외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타인의 자기통제권에 지나치게 간섭하곤 한다. 그런데, 이제 네덜란드가 "미국을 닮아간다"고 한다. 아쉬울 따름이다. 신념과 생활이 하나였던 상인의 나라는 이제 물 건너 가는 걸까.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6. 27. 23:1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 제 친구가 두번째 사랑에 나왔나 봅니다. 어쩜 이렇게 닮을 데가. ㅋㅋ
Posted by 흰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패디 오브라이언이 죽었을 때 조문객들은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그의 관에 돈을 던졌다. 그날 장례식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던 구두쇠도 참석했다. 그 또한 비통한 표정을 짓고 패디의 묘 앞에서 외쳤다. "난 패디 오브라이언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을 보이겠어요. 여러분이 여기에 돈을 얼마를 던져 넣든지간에 난 그 돈의 두 배를 내겠습니다." 구두쇠는 약간 취한 것처럼 보였고, 마을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이 구두쇠에게 한 번 교훈을 얻게 해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문객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지폐와 동전을 모두 관 속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던져 넣은 돈은 3012달러. 이 마을에서 장례식이 벌어진 이래로 가장 많은 액수의 저승길 노잣돈이었다. 그러자 구두쇠는 관 속에서 그 돈을 긁어 모았다. 그리고 패디 오브라이언 앞으로 6024달러 짜리 수표를 한 장 쓴 뒤 관 속에 던져 넣었다.

아일랜드에도 동양과 비슷하게 저승길 가는데 노잣돈을 마련해 주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풍습이야 평소 알 길이 없었지만, 약삭빠른 구두쇠 영감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수완 만큼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야 물론 저렇게 타락해서 살지는 말라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장례를 치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조문객들의 슬픔과 고인에 대한 경건한 추모를 이용해 그 뒤편으로 한 몫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지난해 10월 첫주판에 보면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지난해 사망자 수는 24만5511명(보건복지부 자료). 이 중 화장한 건수가 전체의 52.59%(통계청 자료)로 12만9138건이다. 따라서 지난해 화장 시 총 소요비용은 1조547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매장 시 총 소요비용 1조9224억원을 더하면 지난해 장묘산업 규모는 3조5000억원에 육박한다.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한국의 온라인게임 시장 규모가 아마 이 정도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1~2년 전만 해도 이 돈이면 NHN을 통째로 살 수도 있었다.

저승길에 노잣돈을 챙겨주는 풍습 자체야 별로 탓할 게 없다. 하지만 한번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병원 장례식장에 가면 정말 허접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베니어합판으로 된 관을 하나 두고는 그것보다 훨씬 비싼 관들을 같이 판다. 절대 강매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던 가족을 마지막 보내는데 베니어합판으로 된 관을 선뜻 선택할 유족은 없다. 얼마 안 가 썩어 없어질 수의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4000만 원 짜리 '명품 수의'까지 팔린다는데 그런 걸 보면 부자들은 죽어서 재산을 무덤까지 가져가려는 모양이란 생각도 들곤 한다.

그나마 많이 장례문화가 개선돼 이 정도다. 아직도 매장을 하려면 관을 묻고 무덤을 밟아주는 인부들에게 잘 밟아달라고 1만 원 짜리 지폐를 수십 차례 꺼내 찔러줘야 하고, 화장터에서도 잘 태워 달라고 돈을 찔러줘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모양이다.

기쁜 날, 합리적으로 축하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결혼식이나 돌잔치의 거품은 조금씩 줄어드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픈 날 합리적으로 슬퍼하자고 말하긴 힘들다. 최근에는 다행히 웨딩플래너처럼 장례지도사라는 직업도 등장한 모양이지만, 솔직히 주위에서 찾아본 적이 없다. 써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훌륭한 장례지도사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Posted by 흰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처럼 다시 라켓을 손에 잡았다. 두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아뿔싸, 몸으로 배운 건 잊지 않는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었다. 20분 동안의 짧은 레슨시간이 끝날 때가 됐는데, 그립을 감싸 쥔 오른 손 손가락들이 굳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넷째 약지와 다섯째 새끼손가락. 말도 안 된다. 예전에는 절대 힘을 주지 않던 손가락들이었고, 다른 코치는 엄지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으로도 스윙을 할 수 있었던 내게 칭찬까지 해주곤 했다. 불필요한 힘이 없다고.

그런데, 두달간의 공백기가 자세를 무너뜨린 모양이다. 역시 꾸준히 했어야 하는데... 손이 굳은 나를 보며 코치가 다가와서 그립을 보더니 또 한 마디 했다.
 
"손도 작으신 분이 왜 이리 굵은 그립을 매셨어요? 다른 그립으로 바꿔 감아 드릴게요."

일부러 따로 주문해서 감은 특제 오버그립인데, 무참히 무시하다니. 흑흑.

김코치 어록이라도 쓰고 싶다. 지난번에 서브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주 나오셔야 새 기술을 배우죠. 일주일에 한두번 나오면서 어떻게 진도를 나가요?"라더라. 맞는 말을 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열심히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이를 어쩌남. 테니스를 다시 시작한지 2년 째, 하지만 다시 시작한지 6개월 째 이후로 1년 반 동안 도무지 진전이 없다. 열심히 좀 해보자. 페더러처럼 우아하고 절제된 테니스를 칠 때까지.(실력 말고 폼이라도)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6. 26. 16:0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함께 얘기하고, 함께 술을 마실 때면 김영하의 스타일을 술자리 안주로 삼으며, 가방 속에는 늘 뭔가 책이 한 권 들어 있어 읽을 거리가 없는 상대방에게 꺼내 줄 수 있는 그런 여자를.

하지만 커피숍의 여자들은 책보다는 거울을 꺼내는 경우가 더 많았고, 도서관의 여자들은 고시 문제집이나 영어 문제집을 들고 다녔으며, 지하철의 여자들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정말 많은 여자들이 취미를 독서라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책은 뭔가요, 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곤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6개월 전에나 유행했던 베스트셀러의 이름을 웅얼거리곤 했다. 그는 그네들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던지라 더 당황하곤 했다. 그는 단지, 책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책과 책꽂이를 사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고, 책꽂이 분류법을 고민하면서 희열을 느끼며, 비어있는 책꽂이를 기필코 채워넣고야 말던 그는, 사람들과 만나면 할 얘기가 없었다. 사람들과 만나면 그가 꺼내는 말은 이런 거였다. 난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부분이 나오면 귀퉁이를 접어둬. 나중에 그 부분들을 다시 펼쳐 읽게 되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다시 그 책을 펼쳐 본다면 꼭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거든. 난 책을 험하게 다뤄. 침대에서도 읽고, 감자칩을 먹으면서 기름기 묻은 손으로도 책장을 넘겨. 손에 펜이 있다면, 뭘 쓰기도 하고, 밑줄도 긋고. 두꺼운 책은 귀퉁이만 접어서는 다시 그 부분을 찾기 힘들어서 아예 책장을 반으로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어. 물론 베개로도 쓰고, 라면냄비 받침으로도 쓰지. 오타에는 또 얼마나 민감한데. 공중화장실에서라도 오타가 보이면 펜을 꺼내 고쳐써놓고 나온다니까. 하지만 초판1쇄의 책에서 오타를 발견하면 기뻐. 수정되기 전의 소소한 실수와 함께 한 것 같아서 뭔가 내가 책을 소유하게 된 것 같아. 그가 기대한 건, 이런 말을 꺼내면 책을 어떻게 접을 수 있냐, 책에 뭔가를 쓰다니, 나도 오타는 싫어하는데 등의 맞장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책 같은 거 안 봐도 살 수 있잖아. 1년 동안 한 권도 안 읽어도 멀쩡한걸 뭐. 난 소설은 안 읽어. 도움이 안 되거든. 그 시간에 실용서를 봐야지. 하지만, 물론 그들은 실용서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가 알지 못하는 연예인과, 화장법과, 패션과, 물 좋은 클럽에 대한 대화로 넘어가곤 했다. 그는 책이 없으면 잡지를 보고, 잡지가 없으면 신문을 보고, 신문이 없으면 지하철의 광고판 문구라도 읽어내고야 마는데, 그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와 달리 책을 사는 대신 도서관에서 빌려봤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다고 했으며, 해리포터에 열광하고,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책꽂이가 부족한데도 책도 아닌 프린트조차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고, 읽을 책만 준다면 검정 노트북컴퓨터로 뭔가를 끄적거리는 그의 옆에서 한시간도, 두시간도 기다려준다.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난 그는 요즘 행복하다.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