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머리'에 해당되는 글 127건

  1. 2007.11.21 Federer vs. Sampras 1
  2. 2007.11.12 iMac 1
  3. 2007.11.02 두려움과 두근거림
  4. 2007.10.24 10년 전처럼 음악을 듣다 3
  5. 2007.10.23 나는 그가 이렇게 싱겁게 장가갈 줄 몰랐다. 1
  6. 2007.10.06 평양면옥 1
  7. 2007.08.31 안달루시아로 떠나다 2
  8. 2007.08.27 전화기를 바꾸다 1
  9. 2007.08.15 139의 저주 3
  10. 2007.08.12 여행같은 일상 v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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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이바니세비치에게는 불행이었다. 하필이면 그들 둘이라니. 테니스 선수라면 한 번 올라서기만 해도 영광일 윔블던 센터코트에서 그는 번번이 피트 샘프라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2001년, 30을 넘긴 나이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해서 깜짝 우승을 했을 때 사람들은 이바니세비치에게 '제2의 전성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2002년, 윔블던은 호주의 레이튼 휴잇에게 돌아갔고, 다음해부터는 '페더러의 시대'가 열렸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회 연속 우승. 페더러는 대기록을 세운다. 비욘 보그 이후 27년 만의 일이었다.

테니스의 영웅들은 많았다. 누군가는 서브의 달인이었고, 누군가는 세계 최고의 포핸드 스트로크를 자랑했으며, 공을 라켓에 붙이고 다니는 것 같다는 별명을 듣는 초특급 발리어도 존재했다. 하지만 피트 샘프라스와 같은 선수는 없었다. 안드레 애거시, 고란 이바니세비치, 보리스 베커... 샘프라스의 라이벌들은 단연 세계 최고였다. 그들과 함께 메이저 대회를 뛰어다니며 샘프라스는 윔블던 7회 우승, 메이저대회 14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페더러도 못지 않다. 샘프라스를 우상처럼 여기며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던 그는, 샘프라스조차 이루지 못한 윔블던 5연패를 벌써 이뤘고, 무엇보다 아직도 한창 나이다.

두 사람의 시합을 볼 수 있다는 건 마치 '로키 발보아'를 보는 것 같은 흥분과 긴장이었다. 물론, 로키처럼 샘프라스가 투지를 불태웠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녹슬지 않은 서브와 위력적인 스트로크, 깊고 날카롭게 파고 드는 슬라이스는 한창의 페더러마저 쩔쩔매게 만들었다.

지난해 이맘 때 열린 현대카드 슈퍼매치에서는 세계 1, 2위인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이 맞붙었다. 지난해 경기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와 같았다. 경기 내내 두 라이벌은 유쾌했고, 재미있는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진기명기 시합'같은 장면도 연출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 시합은 일종의 '제의'였다. 페더러는 우상을 상대로 아무런 장난도 치지 않았고, 참혹하다 싶을만큼 몰아붙여 6-4, 6-3의 일방적 스코어로 승리를 가져갔다. 샘프라스는 페더러로부터 15개의 서비스 에이스를 뽑아냈다. 그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p.s. 늘 페더러를 보면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 없이 강력한 서브, 파워풀한 포핸드 탑스핀, 칼날같은 슬라이스, 포핸드만큼 강력한 우아한 백핸드 스트로크, 거리를 줄자로 계산한 듯한 드롭 발리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코트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한 움직임이다. 공이 언제 어떻게 흘러갈지를 계산하고 있는 듯한 동물적인 움직임은 늘 상대방의 허를 찌른다. 샘프라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아마도 쏙 빼닮았을 이 괴물같은 후배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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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머리2007. 11. 1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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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에 아이맥을 들여놨습니다. 집안 정리도 되기 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왜 애플 매니아들이 그렇게 많이 생겨나는지 불과 사흘만에 깨달았습니다. 오늘 모처럼 회사에 출근했더니, 제 윈도XP를 쓰는 IBM 노트북이 어쩜 이렇게도 쓰기 싫은지요.

제 검정노트북은 그동안 험한 곳도 참 많이 다니고, 수도 없이 두들겨 댔으며, 침대 위와 풀밭 위, 사무실 책상 위 가리지 않고 함께 뒹굴던 동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정말이지 후져 보입니다. 맥에서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딱히 PC에서 못할 일이란 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가 더 많죠. PC에선 아무 것도 아닌데 맥에선 무지 힘든 인터넷 뱅킹이나 다양한 국내 인터넷 서비스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걸 하면서도 맥에서는 늘 폼이 납니다. 멋지죠. 게다가 편합니다. PC에선 클릭 세 번을 해야 할 일을 맥에선 한 번이면 되는 식입니다.

써보기 전엔 몰랐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XP밖에 안 써봤지만, 이렇다면 안 봐도 뻔합니다. 보나마나 Vista Su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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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머리2007. 11. 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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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일 거야. 아마도.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기가 참 싫었어. 돈을 내고 일부러 그 고생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말하곤 했지.타기 전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릴 때면 늘 말이 많아지곤 했어. 어릴 적 탔던 광주 도투락랜드의 자그마한 청룡열차부터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세계에서 가장 길다던 롤러코스터까지 참 잘도 주워삼키곤 했지.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떠들고 있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의 초조함을 견뎌낼 수 없었으니까.

긴 줄이 끝나고 내가 타야할 열차가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패닉이 시작되곤 했어. 내가 이걸 왜 탔나. 내가 미쳤지. 이런 생각을 계속 되뇌이곤 했어. 열차가 움직이고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아직 본 게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소리를 질러대곤 했어. 그랬던거야. 두려움의 예상이 지나쳤던 거지.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놀이공원의 인상 대부분은 그 롤러코스터야. 아마도 2~3분 남짓할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감정을 모두 소진시키며 버텨냈던 그 기억들이지. 그렇게 타 내고야 말았던 롤러코스터가 10개가 넘는 것 같아. 놀이공원에 가본 경험의 수와 거의 비슷하니까 나름 롤러코스터를 즐겼던 셈이군.

떨어져 내려오는 그 순간은 환상적이지만 아주 짧곤 했어. 오히려 더 맘에 들었던 건 맘껏 비명을 지르느라 쉬어버린 목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보며 서로 웃어대던 함께 탄 친구들과의 동질감이었지.

몇시간 뒤면 우리는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라는 호칭을 붙여주겠지. 과장됐던 연애 시절의 수다들도 잦아들 테고, 정말 사랑한다는 게 뭔지 살아내 본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주제에 사랑한다고 외쳤던 그 무모함도 빛바랠거야. 깨가 쏟아진다는 행복도 몇달이면 시들해지겠지만, 날마다 함께 저녁을 먹고 TV를 봐야한다는 신념도 약해지겠지만, 함께 롤러코스터에 올랐기 때문에 우리는 열차가 멈춘 뒤에도 서로를 보면 즐거울 수 있을거야.

툴툴거리며 불만을 반복해도 다시 롤러코스터에 오르는 건 그 옆에 친구가 있기 때문이었지. 인생의 첫번째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지금, 두렵지만 두근거리고, 함께 있어서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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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머리2007. 10. 2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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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 전을 생각해 봤다. 첫 MP3플레이어를 구입하기 전이었고, 좋은 음악은 CD를 통해 듣고 있었다. 좋은 음악을 고르는 기준은 '들어보고'였으며, '들어볼 만한' 음악을 고르기 위해 나는 '핫 뮤직'과 같은 음악 잡지를 뒤적이곤 했다. 음악잡지의 기자들이 듣고 또 들으며 골라낸 주옥같은 음반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몇 차례고 갈아타며 압구정동 상아레코드까지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뭐가 그리 많이 바뀐 것일까.

지금 나와 당시의 나는 다르다. 나는 음악을 전보다 많이 듣지도 않고, 음악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으며 '들어볼 만한' 음악을 고르기 위해 잡지를 뒤적이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물론 10년 전과는 달리 직장이 생겼고, 바빠졌으며, 어쩌면 '음악 따위'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음악은 공기다. 없으면 숨이 막힌다. 전에는 좋은 공기를 마시기가 힘들어 노력을 기울였는데, 지금은 주위에 좋은 공기든 나쁜 공기든 손만 뻗으면 공기가 잔뜩 널려 있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랄라닷컴에 대한 기사가 와이어드 매거진에 실렸다. 이들의 사업 모델은 단순했다. 우리가 예전에 음악을 듣던 그 방식을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음악을 들어보고 사세요." 처음에는 한국에도 흔한 단순 스트리밍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1분 짜리 클립만 듣고 음악을 사라는. 그런데, 아니었다. 이건 핫 뮤직이고, 상아레코드다. 랄라닷컴을 만든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이들은 인디음악 전문채널로 이름이 높았으나 인터넷 시대에 수익을 못 내 문을 닫기 직전의 라디오 방송을 사들였고, 온라인으로 음악을 들려준다. 온라인 청취자들은 이 가운데에서 걸작을 골라낸다. 처음 들은 건 제임스 블런트라는 포크 가수. 전율이 밀려왔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라니.

릴리닷컴에서는 제임스 블런트 외에도 수많은 걸작들이 사용자들의 손을 거쳐 다른 사용자들에게로 소개된다. 10년 전과 비교해 좋아진 것은, 제임스 블런트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볼 수 있다는 거다. 내 취향과 비슷한 잡지 기자를 찾아 헤매며 잡지를 읽어 나갈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이 곳에선, 수많은 음악을 수많은 기호에 따라 아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전 곡을. 그러다 마음에 들면 사면 된다. 제임스 블런트의 음반은 CD와 아이팟용 MP3 파일로 합쳐져서 9.99달러에 판매된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빌보드 차트에 오른 노래를 장르별로 P2P에서 검색해 내 아이팟에 옮겨 담았고, 제대로 듣지도 않는 노래들을 그저 쌓아놓는 데만 열중했다. 음악 잡지란 건 아예 읽지도 않았고, 좋은 음악을 찾아보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합법적'이라는 단어와 '좋은 음악'이란 단어는 몹시도 달라 보였다. 가요 말고는 구입하기도 쉽지 않았고, 맘에 드는 음악은 죄다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에만 몰려 있어서 한국에서 발행된 카드로는 살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인터넷은 내게 공기를 빼앗았고, 선택의 다양성을 빼앗았다. 다시 상아레코드에 가기에 나는 나이를 먹었고, 배가 나왔으며, 몹시도 게을러졌다.

그래서 랄라닷컴에게 고맙다. 적어도 여기서는 좋아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아직 구매는 모르겠다. 제임스 블런트의 MP3를 사보려니, CD를 발송하겠다며 주소를 굳이 요구한다. 조금 더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일단 오늘은 감격에 겨워 잠을 청하는 게 먼저.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10. 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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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훈이 이렇게 ‘싱겁게’ 장가갈 줄 몰랐다.

  솔직히 고백컨대 입사 몇 달 뒤 어느 술집에서 “네 결혼방은 내가 써준다”고 선포한 속셈에는 사실 “너의 연애를 추적하다보면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다”는 타산을 머리 속에 굴렸기 때문이다.

 “상대를 녹이는 화려한 멘트들과 감동적인 이벤트들, 늘 신선한 데이트 코스 개발, 위기 시 상황 대처법 등등 내가 응용할 수 있는 무한한 콘텐츠를 갖고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러한 타산이 빗나갔음을 고백하며 입만 다신다.

  “사랑은 못해 본 놈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말은 상훈이에게 들어맞는 말 같다. 그는 비단보에 싼 빛깔 좋은 개살구였다.

  혹은 말과 행동이 필요 없이 눈웃음 하나로 상대를 끌고 오는, 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일 수도 있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파악이 안 된다.

  어느 골목에든 ‘이리 오너라’고 부르는 다양한 네온불빛이 꽉 차 있는 서울에서, 안방엔 남주인공이 새라 새로운 이벤트를 ‘짜잔~’하고 보여주는 드라마가 장악한 이 대한민국 바닥에서 이렇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쨌든 동기 상훈(경영전략실 역량강화팀)이가 한살 아래인 여수빈(29·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양과 11월 3일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현실이다.

 

  ◆책 읽는 여자를 만나다

  그와 그녀와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30일. 첫 만남도 대학 후배가 주선한 ‘소개팅’이라는 ‘고리타분’과 동의어인 고전적인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는 소개팅에 “일하던 차림의 구질구질한 차림으로 아무런 기대로 없이 나갔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 역시 “나는 아무 거나 입어도 매력있다”는 것을 내비치기 위해 남자들이 아주 흔하게 써먹는 수법이라 믿어지진 않는다. (상훈아, 난 네가 구질구질하게 입은 적을 본 적 없거든.)

  아무 기대 없이 나갔다는 것은 “우리의 만남은 그만큼 운명적인거야”를 은연중 강조하기 위해 너무나 흔히들 써먹는 수법으로 사료된다.(그녀도 자신이 기대 없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 사람이 서로 끌린 점이 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이 주장이 ‘이지적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둘의 놀이터이자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비밀 블로그에 가면 서평과 관전평이 가득한데, 지적 경쟁이라도 하듯 짜내고 다듬은 미문들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사랑이 얼마나 고뇌에 찬 노고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정신적 사랑 같은 건 절대 안할 거야”라는 결심을 굳혀주는 타산지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녀가 소개팅에서 둘의 공통점을 확인한 책이 ‘나를 부르는 숲’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라는 미국 기자가 썼고 현재 NHN에 근무하는 홍은택 선배가 번역한 책이다. 선배가 번역한 책이 후배가 장가가는 오작교가 됐다니 의미가 깊다.

  그는 그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다.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책과 책꽂이를 사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고, 책꽂이 분류법을 고민하면서 희열을 느끼며, 비어있는 책꽂이를 기필코 채워 넣고야 마는 그런 여자.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부분이 나오면 귀퉁이를 접어둔다거나, 침대에서도 읽고, 감자칩을 먹으면서 기름기 묻은 손으로도 책장을 넘기는 등 책을 험하게 읽는다는 식의 버릇에 대해서 말하는 그런 여자. 책을 베개로도 쓰고, 라면냄비 받침으로도 쓰는. 초판 1쇄의 책에서 오타를 발견하고는 수정되기 전의 소소한 실수를 저자와 함께 발견한 것 같은 느낌에 희열을 느끼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함께 맞장구칠 수 있는….

  책 같은 거 안 봐도 살 수 있잖아. 1년 동안 한 권도 안 읽어도 멀쩡한걸 뭐. 난 소설은 안 읽어. 도움이 안 되거든. 그 시간에 실용서를 봐야지. 그럼 무슨 실용서를 봤는데? 기억이 잘 안 나. 이런 식의 대화는 싫었다. 연예인과, 화장법, 패션과 물 좋은 클럽 얘기는 진부하고 지겨웠다.

  어느 날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책을 많이 샀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이 더 많았고, 해리포터에 열광하고,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책꽂이가 부족한데도 책도 아닌 프린트조차 쉽게 버리지 못했고, 읽을 책만 있다면 나를 기다리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 행복하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책꽂이를 합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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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면집을 전전하다

  첫 만남 이후 이들은 일주일에 닷새 꼴로 만난다.

  둘의 만남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첫 만남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다. 이런 여자 다시는 못 만난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한다. 나이 서른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논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몹시도 장가가고 싶어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도 당시 고려대 영상문화학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에는 취직하고 시집도 빨리 가야지”라는 각오가 가장 왕성한 때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언니가 빨리 가야 나도 가지”라고 매일 쪼아대는 28살 난 여동생이 있다.

  내가 불가사의한 점은 연애 중에 한번도 다퉈본 적이 없다는 이들의 증언이다.

  둘이 만난지 한달 쯤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여자이니 잘 말해 달라”면서 원군을 불렀다. 하지만 원병으로 술자리에 참석한 정 모 동기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실언을 했다.

  “수빈 씨, 제가 상훈이를 잘 아는데 괜찮은 놈이에요.” 여기까진 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리고 제가 상훈이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을 꽤 아는데, 그 중에 수빈 씨가 제일 나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물론 훗날에도 그녀가 이 말을 다시 꺼낸 적은 한번도 없다니 이렇게 이해심이 많고 대범한 여인을 그가 ‘기자의 천생의 배필’이라고 생각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나에게 “지나간 일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해 순간적으로 ‘제행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니냐는 착각도 불러 일으켰으나, 실은 믿는 종교가 없다.

  물론 나는 ‘주문제작한 맞춤형 신부’의 이미지를 제조하기 위해 그가 그녀에게 수십 번도 더 할퀴이고 얼차려를 당하고, 거절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죽을 때까지 혼자 꿍꿍 품고 가야 한다. 그래서 부부에겐 부부만의 역사가 있는 거다.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그가 경제부에서 데스크에게 쪼여 늦어지고 있을 때도 교보문고에서 문 닫을 때까지 책에 빠져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책과 남자와 동시에 연애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그가 내심 늦게 내려오길 바라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둘의 연애 장소는 커피숍과 영화관이라는 너무나 단조로운 코스였다.

  일년도 안돼 둘이 7만 포인트(1만원에 1000포인트)가 넘는 영화 포인트를 모았다니 이들이 대한민국 영화산업 부흥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 둘이 맞지 않은 부분은 영화뿐이었다. 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좋아하는데 비해 그녀는 유럽 멜로 영화를 좋아했다. 서로 엇바꾸어 보았는데, 액션영화를 보다보면 그녀가 자고 있었다”고 말해 나의 질투를 유발시켰다.

  부부의 영화 취향이 같다는 게 얼마나 확률적으로 힘든 것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하다니….

  둘 다 냉면을 좋아해 늘 냉면집만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관과 냉면집, 커피숍만을 오간 이런 단조로운 동기에게서 뭘 배울 것이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를 품었던 내가 너무 한심하다.

  ◆‘너랑 꼭 결혼할거야’

  그는 아직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지 않는 간덩이가 부은 남자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좋단다.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백한 것은 만난지 6개월이 채 안된 올해 5월.

  술에 거나하게 취해 그녀를 바래주던 그가 집 앞에서 갑자기 “나는 너랑 꼭 결혼할 거야. 너 대답은 중요치 않아”하고 한마디 내던진 것이다.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럴 때 대답이 없었다면 십중팔구는 “기다리고는 있었는데, 다만 너무 빠른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

  말없이 집에 들어간 그녀는 부모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침실로 사라졌다.

  “나 남자 사귀는데 그 오빠랑 꼭 결혼할거야. 엄마, 아빠 대답은 중요치 않아.”

  그녀가 취직에 성공한 7월에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 더 통보한다.

  “이달 중에 너의 집에 인사가야겠어.”

  이번에도 그녀는 알아서 해결했다.

  “그 오빠가 집에 오는데 승인안하면 나 확 죽어버릴 거야.”

  잔뜩 답변을 준비하고 긴장해서 그녀 집에 쳐들어간 그는 예상외의 반응에 놀랐다.

  그녀의 부친이 아무 말 없이 술만 따라주었던 것.

  세 잔을 부어 준 다음에야 그녀의 부친은 입을 열었다.

  “인상이 좋구만. 가정 이루고 살면 행복하겠어.”

  그녀도 부친도 협박하고 협박당한 ‘내부 비밀’을 차마 털어놓을 순 없었다.

  ◆빌바오의 연인

  둘은 결혼을 앞두고 9월초에 스페인으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학력위조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때라 그녀에게 “서울대 서어서문학과를 나오고 스페인어권에 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이 남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일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속셈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마지막 고비에서 그는 사랑에 미쳤음을 증명하는 초인적인 열정으로 그녀를 감동시켰다.

  마드리드-세고비아-톨레도-그라나다-세비아를 거쳐 북부 빌바오까지. 렌터카 미터기는 2500㎞를 찍었다. 어떤 날에는 하루 700㎞를 달렸다.

  계속 운전만 한다는 것은 진짜 스페인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그만큼 줄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스페인에서 그녀는 이성을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감성과 환상만 남겼다.

  “날 위해 미친 듯 달리고도 행복해하는 이 남자. 이제 날 달나라에도 데려다 줄꼬얌.”

  그는 스페인에서 사진만 가뜩 찍어왔다고 주장하나, 그녀가 영상문화학 석사인 점을 미루어 볼 때 둘만 몰래 오붓하게 꺼내 볼 영상물들을 제작해 집 서랍 가장 구석에 꼭꼭 숨겨놓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이 현재 세운 2세 계획은 1명. 결혼 즉시 2세 프로젝트에 착수하겠다는 그녀와 1년 만 뒤로 미루자는 그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어 이 미묘한 문제에 중재자가 간섭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이다.

   그는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유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는데, 즐거움은 크게 늘어났다.”

  이 말엔, 속이 뒤집힌 많은 유부남 선배들이 입이 근질거릴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크게 줄었는데, 니가 즐거움밖에 안 보이는 거여. 3년 살고 다시 평가해.”

  이래서 결혼은 연애를 시작해 1년 안에 속전속결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결혼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고하시는 회사 모든 노총각, 노처녀 분들이 참고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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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기가 써 준 결혼 공지문. 긴 글을 압축해서 신문 모양으로 편집도 했습니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좋은 건, 이런 소소한 재미죠. 글을 써 준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입니다. 주 기자는 "김일성대 졸업생이 서울대 졸업생 결혼 기사를 쓰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사건이든, 아니든 관계 없이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10. 6. 00:52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크곤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이북분이셨다. 고향은 평안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외식을 가곤 했던 어린 시절, 우리는 곧잘 냉면집에 가곤 했다. 그것이 평양냉면과의 만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접을 가득 채워주던 냉면을 한 그릇 비우고는 국물까지 싹싹 마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8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냉면을 혼자 한 그릇을 먹는다"며 어린 손자를 칭찬하곤 하셨다.

장충동 평양면옥은 수많은 평양냉면 집 가운데서도 냉면맛이 꽤 정석적인 유명한 식당이다. 그렇다보니, 늘 손님이 줄을 선다. 이 곳에선 손님 대접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다. 조선족으로 여겨지는 투박한 이북 억양의 아주머니들은 손님이 불러도 대답도 잘 하지 않기 일쑤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 집 단골이 된 게 15년 째다. 맛있으니까, 좀 대접이 소홀해도 참을 수 있었다. 냉면값을 올려 받아도 참을 수 있었고, 발레파킹 비용을 따로 받기 시작했어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땐 처음으로 뛰쳐나오고 싶어졌다. 식당 한가운데에 앉았더니 에어컨 바람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손님은 좀 많았지만, 에어컨 바람을 온몸에 쐬고 있을만큼 더운 날씨는 아니라, 일어나서 에어컨 방향을 위로 돌렸다. 순간,

"아저씨! 그거 만지지 마요!"

설마 나를? 고개를 돌렸더니 바로 나였다. 주인 아저씨의 친척으로 보이는(15년을 다니다보니 단순 종업원과 붙박이로 나오는 분들은 구분이 된다.) 험상궂은 아저씨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바람이 정면으로 와서요." 뭔가 잘못한 듯 대답해야만 했다. "아, 정말!" 이 아저씨는 화를 내더니 내가 돌려놓은 에어컨 날개를 다시 내 정면으로 고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바람이 싫으면 자리를 비켜 앉던가!"라며 무안을 주는 것이다. 일어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 냉면이 정말 먹고 싶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래, 옮겨 앉으라면 옮겨 앉아야지. 이번에는 종업원 아주머니가 화를 냈다. "아니, 테이블을 바꿔 앚으면 어떻게 해요. 주문은 테이블 번호대로 들어가는데!" 울어야 하는 걸까,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처음이었다. 이 가게에서 불평을 쏟아낸 것은.

그래도, 난 계속 평양면옥에 간다. 또 가고, 또 간다. 지난 주말에도 갔고, 이번 주말에도 갈지 모른다. 젠장, 이정도면 중독이고, 이 음식은 아마도 마약류에 속하는 게 아닐까. 이제까지 이집에서 팔아준 음식값을 모으면 적어도 쏘나타 한 대는 살텐데. 이 가게에서는 걸쭉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할아버지들의 호통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주로 "냉면 맛이 변했어! 이거이 예전 그 맛이 아냐!" 식이다. 하지만, 걸작은 지난번 사람이 무진장 많았던 날 만났던 한 할아버지였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이 맛도 없는 냉면집에 왜 이리 많이 몰려오는거야!"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단골이시잖아요. 아, 이, 맛이 갈대로 가버린 냉면중독자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8. 31. 00:38
출발 하루 전.

비행기표 시간도 모르고 환전도 하지 않았다. 짐은 당연히 못 쌌고 준비물 목록은 여기에 작성중.

세면도구, 옷가지, 카메라와 충전기, 블랙잭과 역시 충전기, 여권과 전자항공권 출력본, 그리고 각각의 사본, 비자와 마스타 신용카드 각 1장, 국제면허증과 국내면허증, 운전용 선글라스와 론리플래닛... 무엇보다 현금.

빼먹은 것은 없을까. 혼자라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준비물 목록은 언제나 단촐했다. 돈 신용카드 여권과 항공권 그리고 카메라와 충전기. 준비물 목록이 늘어난 것은 동반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떠나보는 혼자가 아닌 여행. 짊어지게 된 것은 많은 짐이지만 덜어낸 것은 외로움이다. 자유는 아마도 줄어들겠지만, 그 대신 가족이 생겼다. 한살씩 나이를 먹고 남처럼 늙어간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일상은 인생이 내게 선물하는 작고 지속적인 '경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안달루시아로 떠난다. 유럽 최고의 태양과 원색의 물결이 흘러 넘치는 곳으로. 감당할 만한 책임과 즐길 만큼의 부담을 안고, 분에 넘치는 행복과 값을 따질 수 없는 동반자를 곁에 둔 채로.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8. 27. 01:16

주말이 기계와 함께 흘러갔다. 이리 보고, 저리 만지며, 이러저런 기능을 추가하다보니 토요일과 일요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이 바로 전에 썼던 핸드폰은 M4300이라는 PDA폰이었다. 평소 대충 파악해야 하는 연락처가 1000개를 넘어가는 터라, 핸드폰에서 바로 전화번호를 확인해야했는데, 일반 핸드폰으로는 그 정도 연락처를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열심히 쓰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내 핸드폰만 보면 '탱크'라거나 '아령'이라며 놀려댔다. 게다가 최근 들어 이 녀석은 수 차례씩 갑자기 작동을 멈추고 전화 수신을 거부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겉보기로는 멀쩡해서 전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전화기를 껐다 켠 뒤에야 전화를 건 사람들로부터 문자가 쏟아지면서 "통화가 안 된다"는 불평 및 비난이 빗발치는 일을 몇 차례 겪고 있었는데, 그 때 등장한 것이 바로 이 '블랙잭'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들은 맘에 드는 새 폰이 나오면 갖고 있는 폰을 괴롭혀서 망가뜨린 뒤 "고장나서 어쩔 수 없어"라며 새 폰을 산다지만, 내 핸드폰은 알아서 문제를 일으키던 중이었다. 더욱이 금상첨화로 생일마저 다가오고, 여자친구는 내 선물을 뭘로 해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최신기능의 새 핸드폰은 가격마저 다른 핸드폰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단 돈 25만9000원. 그것도 그동안의 장기사용 혜택을 포기할 필요도 없이 KTF로 발매가 된 것이다.

'이 정도면 당장 사라는 신의 계시'라는 생각에 손에 넣은 새 핸드폰. 매우 만족스럽다. MP3나 동영상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워드나 액셀 문서를 보는 것도 그러려니 싶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사는 가장 큰 이유인 연락처 관리가 훨씬 자유롭고(2000개에 가까운 연락처 탐색인데도 속도가 꽤 괜찮다), 구글의 스마트폰을 위한 구글맵스를 사용하면 전 세계의 위성사진도 핸드폰을 통해 볼 수 있다. 영어사전도 시판되는 전자사전보다 오히려 나은 것 같고, 이 모든 것을 쿼티(QWERTY) 자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검색 속도도 뛰어나다. 무엇보다 이 자판 덕분에 그동안 천지인 등에 영 익숙해지지 못했던 내가 문자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블루투스도 편리하기 그지 없다. PC와 데이터를 주고 받을 때도, 차에서 핸즈프리를 쓸 때도, 모든 게 무선이다. 더 이상 뒤엉킨 선 따위는 필요 없다. 드디어 해방이다. Thanks a lot, Purslane!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8. 15. 21:08
회사 도서관에서 책 8권을 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신 터라 무단으로 들고 나왔다. 나같은 사람들이 책을 가져갈까봐 회사에서 몹시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책 날개와 하드커버를 무지막지한 이삿짐용 셀룰러 테이프로 붙여놓고, 분류기호 표시 스티커를 책등에다 붙인 것으로도 모자라 책 옆 모서리와 윗 모서리마다 회사 이름을 콱콱 스탬프로 찍어놓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화룡정점이 있었으니...

139페이지까지 책을 읽어나가면 꼭 스탬프로 날인된 회사 심벌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139, 하필이면 왜 139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이 숫자가 참 묘하다. 우선 13이라는 불길한 숫자로 시작된다. 또 1+3=4로, 이 또한 불길한 숫자이며, 1+3+9=13이라서 역시 불길한 숫자다. 1*3*9=27인데, 이는 또 2+7=9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한마디로 책을 훔쳐가면 불길함에서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는 저주가, 마치 뫼비우스의 고리마냥 책마다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은 집에 시중에서 절판돼 구할 수 없는 회사 책을 한 권 무단으로 보유하고 있다. 절판된 책이라 뻔뻔스럽게도, 장기대출중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변명 하에 여전히 들고 있었다. 139의 저주를 알아버린 지금, 빨리 반납하든지 돈으로 해결하든지 해야겠다. 아, 사서의 센스가 무섭다.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8. 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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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나는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곳은 수많은 여행지 가운데 하나이고, 집을 떠나 머물고 있을 저 곳은 수많은 집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믿어왔다. 내 일상은 그래서 늘 여행이었다. 행선지를 정하고, 교통편을 마련하고, 배낭을 단촐하게 꾸리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오늘을 떠나는.

결혼은 이런 여행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훌쩍 생각날 때 떠나지 못하고,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길이라고만 여겼다.

지난해, 터키로 떠나기 3개월 전. 나는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2개월 전에는 대략의 여행 루트를 마음 속으로 정했다. 1개월 전에는 숙소 1, 2곳을 역시 마음 속으로 정할 수 있었다. 출발 일주일 전에는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목록으로 작성하기 시작했고, 여행서를 샀다. 출발 전날, 나는 평소와 똑같이 잠을 설쳤고, 달러를 약간 챙겼으며, 미리 준비한 목록에 따라 배낭을 단촐하게 쌌다.

그러고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썬크림을 두고온 사실을 깨달았다. 자정에야 도착한 공항에서는 마지막 버스가 떠나 버렸다. 시내로 가려면 택시를 타는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기껏 흥정 끝에 선택한 호텔은 생각보다 허름하고, 또 외진 곳에 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기아 소피아는 사실상의 여행 첫 날인 월요일이 정기 휴관일이었다. 대충 짜 놓았던 여행 루트는 여행을 하는 기간 내내 바뀌었으며, 괜찮아 보이는 서비스나 상품은 무엇이든 예상보다 값이 비쌌다.

지금, 결혼을 3개월 앞둔 나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고 선배들의 인생 경험담을 듣고 있다.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신혼여행지를 고르며, 살 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2개월 전에는 턱시도를 입은 채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을 테고, 1개월 전에는 이곳저곳에 인사를 다니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청첩장을 발송하느라 정신이 없을 게 뻔하다. 그 모든 부산한 과정을 위해 웨딩 플래너가 옆에서 상담을 해주고 있고, 허니문 플래너라는 새로운 직업도 만나게 됐다. 양가 부모도, 신부가 될 사람도, 나 스스로도 모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러고도 막상 결혼 생활이 시작되면 이곳저곳에서 실수가 생겨날 것이다. 빨래를 어디에 모을지, 쓰레기는 누가 버릴지, 새 집에서 출퇴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러다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지도 모르고, 큰 소리나 긴 침묵이 생길지도 모른다. 대출과 예금, 투자와 생활비 등 한 번도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들이 모두 눈 앞에 닥치면 그 순간들은 어떻게 넘겨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터키는 최고의 여행지였다. 하기아 소피아는 장엄했고, 수시로 바뀐 여행 루트는 최고의 효율을 안겨 줬으며, 보석같은 작은 도시들에서 꿈같은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결혼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비용이 들지, 어떤 예측불가능함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최고의 여행이지 않을까.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다. 한 번도 떠나보지 못했던 둘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 가슴이 설레는. 나는 지금 행선지를 정하고, 교통편을 마련하고, 배낭을 단촐하게 싸는 중이다. 여행같은 일상 ver. 2.0을 위해서.

Posted by 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