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이 이렇게 ‘싱겁게’ 장가갈 줄 몰랐다.
솔직히 고백컨대 입사 몇 달 뒤 어느 술집에서 “네 결혼방은 내가 써준다”고 선포한 속셈에는 사실 “너의 연애를 추적하다보면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다”는 타산을 머리 속에 굴렸기 때문이다.
“상대를 녹이는 화려한 멘트들과 감동적인 이벤트들, 늘 신선한 데이트 코스 개발, 위기 시 상황 대처법 등등 내가 응용할 수 있는 무한한 콘텐츠를 갖고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러한 타산이 빗나갔음을 고백하며 입만 다신다.
“사랑은 못해 본 놈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말은 상훈이에게 들어맞는 말 같다. 그는 비단보에 싼 빛깔 좋은 개살구였다.
혹은 말과 행동이 필요 없이 눈웃음 하나로 상대를 끌고 오는, 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일 수도 있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파악이 안 된다.
어느 골목에든 ‘이리 오너라’고 부르는 다양한 네온불빛이 꽉 차 있는 서울에서, 안방엔 남주인공이 새라 새로운 이벤트를 ‘짜잔~’하고 보여주는 드라마가 장악한 이 대한민국 바닥에서 이렇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쨌든 동기 상훈(경영전략실 역량강화팀)이가 한살 아래인 여수빈(29·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양과 11월 3일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현실이다.
◆책 읽는 여자를 만나다
그와 그녀와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30일. 첫 만남도 대학 후배가 주선한 ‘소개팅’이라는 ‘고리타분’과 동의어인 고전적인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는 소개팅에 “일하던 차림의 구질구질한 차림으로 아무런 기대로 없이 나갔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 역시 “나는 아무 거나 입어도 매력있다”는 것을 내비치기 위해 남자들이 아주 흔하게 써먹는 수법이라 믿어지진 않는다. (상훈아, 난 네가 구질구질하게 입은 적을 본 적 없거든.)
아무 기대 없이 나갔다는 것은 “우리의 만남은 그만큼 운명적인거야”를 은연중 강조하기 위해 너무나 흔히들 써먹는 수법으로 사료된다.(그녀도 자신이 기대 없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 사람이 서로 끌린 점이 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이 주장이 ‘이지적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둘의 놀이터이자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비밀 블로그에 가면 서평과 관전평이 가득한데, 지적 경쟁이라도 하듯 짜내고 다듬은 미문들을 읽고 있노라면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사랑이 얼마나 고뇌에 찬 노고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정신적 사랑 같은 건 절대 안할 거야”라는 결심을 굳혀주는 타산지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녀가 소개팅에서 둘의 공통점을 확인한 책이 ‘나를 부르는 숲’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라는 미국 기자가 썼고 현재 NHN에 근무하는 홍은택 선배가 번역한 책이다. 선배가 번역한 책이 후배가 장가가는 오작교가 됐다니 의미가 깊다.
그는 그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다.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책과 책꽂이를 사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고, 책꽂이 분류법을 고민하면서 희열을 느끼며, 비어있는 책꽂이를 기필코 채워 넣고야 마는 그런 여자.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부분이 나오면 귀퉁이를 접어둔다거나, 침대에서도 읽고, 감자칩을 먹으면서 기름기 묻은 손으로도 책장을 넘기는 등 책을 험하게 읽는다는 식의 버릇에 대해서 말하는 그런 여자. 책을 베개로도 쓰고, 라면냄비 받침으로도 쓰는. 초판 1쇄의 책에서 오타를 발견하고는 수정되기 전의 소소한 실수를 저자와 함께 발견한 것 같은 느낌에 희열을 느끼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함께 맞장구칠 수 있는….
책 같은 거 안 봐도 살 수 있잖아. 1년 동안 한 권도 안 읽어도 멀쩡한걸 뭐. 난 소설은 안 읽어. 도움이 안 되거든. 그 시간에 실용서를 봐야지. 그럼 무슨 실용서를 봤는데? 기억이 잘 안 나. 이런 식의 대화는 싫었다. 연예인과, 화장법, 패션과 물 좋은 클럽 얘기는 진부하고 지겨웠다.
어느 날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책을 많이 샀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이 더 많았고, 해리포터에 열광하고, 스티븐 킹의 단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책꽂이가 부족한데도 책도 아닌 프린트조차 쉽게 버리지 못했고, 읽을 책만 있다면 나를 기다리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 행복하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책꽂이를 합친다.”
◆냉면집을 전전하다
첫 만남 이후 이들은 일주일에 닷새 꼴로 만난다.
둘의 만남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첫 만남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다. 이런 여자 다시는 못 만난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한다. 나이 서른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논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몹시도 장가가고 싶어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도 당시 고려대 영상문화학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에는 취직하고 시집도 빨리 가야지”라는 각오가 가장 왕성한 때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언니가 빨리 가야 나도 가지”라고 매일 쪼아대는 28살 난 여동생이 있다.
내가 불가사의한 점은 연애 중에 한번도 다퉈본 적이 없다는 이들의 증언이다.
둘이 만난지 한달 쯤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여자이니 잘 말해 달라”면서 원군을 불렀다. 하지만 원병으로 술자리에 참석한 정 모 동기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실언을 했다.
“수빈 씨, 제가 상훈이를 잘 아는데 괜찮은 놈이에요.” 여기까진 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리고 제가 상훈이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을 꽤 아는데, 그 중에 수빈 씨가 제일 나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물론 훗날에도 그녀가 이 말을 다시 꺼낸 적은 한번도 없다니 이렇게 이해심이 많고 대범한 여인을 그가 ‘기자의 천생의 배필’이라고 생각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나에게 “지나간 일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해 순간적으로 ‘제행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니냐는 착각도 불러 일으켰으나, 실은 믿는 종교가 없다.
물론 나는 ‘주문제작한 맞춤형 신부’의 이미지를 제조하기 위해 그가 그녀에게 수십 번도 더 할퀴이고 얼차려를 당하고, 거절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죽을 때까지 혼자 꿍꿍 품고 가야 한다. 그래서 부부에겐 부부만의 역사가 있는 거다.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그가 경제부에서 데스크에게 쪼여 늦어지고 있을 때도 교보문고에서 문 닫을 때까지 책에 빠져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책과 남자와 동시에 연애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그가 내심 늦게 내려오길 바라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둘의 연애 장소는 커피숍과 영화관이라는 너무나 단조로운 코스였다.
일년도 안돼 둘이 7만 포인트(1만원에 1000포인트)가 넘는 영화 포인트를 모았다니 이들이 대한민국 영화산업 부흥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 둘이 맞지 않은 부분은 영화뿐이었다. 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좋아하는데 비해 그녀는 유럽 멜로 영화를 좋아했다. 서로 엇바꾸어 보았는데, 액션영화를 보다보면 그녀가 자고 있었다”고 말해 나의 질투를 유발시켰다.
부부의 영화 취향이 같다는 게 얼마나 확률적으로 힘든 것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하다니….
둘 다 냉면을 좋아해 늘 냉면집만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관과 냉면집, 커피숍만을 오간 이런 단조로운 동기에게서 뭘 배울 것이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를 품었던 내가 너무 한심하다.
◆‘너랑 꼭 결혼할거야’
그는 아직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지 않는 간덩이가 부은 남자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좋단다.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백한 것은 만난지 6개월이 채 안된 올해 5월.
술에 거나하게 취해 그녀를 바래주던 그가 집 앞에서 갑자기 “나는 너랑 꼭 결혼할 거야. 너 대답은 중요치 않아”하고 한마디 내던진 것이다.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럴 때 대답이 없었다면 십중팔구는 “기다리고는 있었는데, 다만 너무 빠른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
말없이 집에 들어간 그녀는 부모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침실로 사라졌다.
“나 남자 사귀는데 그 오빠랑 꼭 결혼할거야. 엄마, 아빠 대답은 중요치 않아.”
그녀가 취직에 성공한 7월에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 더 통보한다.
“이달 중에 너의 집에 인사가야겠어.”
이번에도 그녀는 알아서 해결했다.
“그 오빠가 집에 오는데 승인안하면 나 확 죽어버릴 거야.”
잔뜩 답변을 준비하고 긴장해서 그녀 집에 쳐들어간 그는 예상외의 반응에 놀랐다.
그녀의 부친이 아무 말 없이 술만 따라주었던 것.
세 잔을 부어 준 다음에야 그녀의 부친은 입을 열었다.
“인상이 좋구만. 가정 이루고 살면 행복하겠어.”
그녀도 부친도 협박하고 협박당한 ‘내부 비밀’을 차마 털어놓을 순 없었다.
◆빌바오의 연인
둘은 결혼을 앞두고 9월초에 스페인으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학력위조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때라 그녀에게 “서울대 서어서문학과를 나오고 스페인어권에 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이 남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일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속셈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마지막 고비에서 그는 사랑에 미쳤음을 증명하는 초인적인 열정으로 그녀를 감동시켰다.
마드리드-세고비아-톨레도-그라나다-세비아를 거쳐 북부 빌바오까지. 렌터카 미터기는 2500㎞를 찍었다. 어떤 날에는 하루 700㎞를 달렸다.
계속 운전만 한다는 것은 진짜 스페인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그만큼 줄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스페인에서 그녀는 이성을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감성과 환상만 남겼다.
“날 위해 미친 듯 달리고도 행복해하는 이 남자. 이제 날 달나라에도 데려다 줄꼬얌.”
그는 스페인에서 사진만 가뜩 찍어왔다고 주장하나, 그녀가 영상문화학 석사인 점을 미루어 볼 때 둘만 몰래 오붓하게 꺼내 볼 영상물들을 제작해 집 서랍 가장 구석에 꼭꼭 숨겨놓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이 현재 세운 2세 계획은 1명. 결혼 즉시 2세 프로젝트에 착수하겠다는 그녀와 1년 만 뒤로 미루자는 그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어 이 미묘한 문제에 중재자가 간섭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이다.
그는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유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는데, 즐거움은 크게 늘어났다.”
이 말엔, 속이 뒤집힌 많은 유부남 선배들이 입이 근질거릴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크게 줄었는데, 니가 즐거움밖에 안 보이는 거여. 3년 살고 다시 평가해.”
이래서 결혼은 연애를 시작해 1년 안에 속전속결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결혼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고하시는 회사 모든 노총각, 노처녀 분들이 참고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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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기가 써 준 결혼 공지문. 긴 글을 압축해서 신문 모양으로 편집도 했습니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좋은 건, 이런 소소한 재미죠. 글을 써 준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입니다. 주 기자는 "김일성대 졸업생이 서울대 졸업생 결혼 기사를 쓰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사건이든, 아니든 관계 없이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