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으로 보니까 꽤 실감이 난다.

닌텐도의 위(Wii)가 한국에 정식으로 판매되면 꼭 한 대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녀석도 몹시 탐난다. 역시 중요한 건 인터페이스. 처음에는 기사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터치스크린 패널을 30인치 크기로 만들면 단가가 어마어마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프로젝션 TV 아래에 적외선 인식장치를 달았더라. 문제는 화면을 키우면 키울수록 표면 뒤에 공간이 필요해질텐데, 적외선 장치만으로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깨지기 쉬운 터치스크린 역시 대안은 아닐 테고. 벽에 걸어놓고서도 '서피스 컴퓨팅(surface computing)'이 가능한 값싸고 상용화 가능한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정말 대박일 텐데.

그나저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것 치고, 눈길을 확 끄는 건 난생 처음 본 것 같다. 애플에서 또 아이디어 도용이라고 뭐라고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완성도로 경쟁사보다 앞서서 제품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정마다 TV앞 탁자가 이 컴퓨터로 바뀌는 상상을 해봤다. 음... 아마도 내 자식 세대에서는 옛날 가정 풍경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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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을 막 마치고, 이 인터페이스 개발에 참여한 뉴욕주립대 제프 한의 홈페이지를 찾아가봤다. 굉장히 인상적이고 값도 낮출 수 있어보이는 서피스 컴퓨팅 기술의 미래가 보였다.
http://cs.nyu.edu/~jhan/ledtouch/index.html

발광다이오드(LED)를 백라이트로 촘촘히 박아넣는다면 벽걸이 서피스컴퓨팅도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LED는 응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는 것 같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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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는 정말 대단한 작물이었다. 그저 아무 곳에나 심어놓으면 혼자 알아서 자라줬다.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정성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태풍이 몰려와 옥수수대를 모두 휩쓸어가지만 않도록 기도만 하면 됐다. 더욱이 자라기도 빨리 자랐다. 순식간에 키가 커져 먹을만해지는 이 작물은 2모작이 아니라 3모작, 4모작도 가능했다.

마야, 잉카, 아스텍 등 중남미의 어마어마한 고대 문명은 옥수수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저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자라나는 옥수수 덕분에 먹고 살 걱정이 사라진 고대 왕국은 남는 시간을 어마어마한 피라밋을 건설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는 데 사용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옥수수는 여전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자라는 작물이다. 기후 조건을 심각하게 따지고, 농부의 노동에 비례해 성장해 주는 밀과 쌀 등의 고약한 작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옥수수는 늘 값이 저렴했고, 흔하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옥수수값이 급격히 오르고 있다.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나라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옥수수가 석유를 대신할 바이오연료의 원료로 각광받기 시작해서다. 미국 농지의 가격이 모처럼 폭등하고, 옥수수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바이오연료의 장점은 바이오연료의 원료인 식물이 재배되는 동안 대기중의 온실가스를 흡수함으로써 나중에 연료로 쓰일 때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미리 벌충한다는 데 있다. 화석연료야 꺼내쓴 만큼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늘릴 뿐이지만, 바이오연료는 자기가 배출할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온실가스를 스스로의 일생 중에 먹어치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었다. 바이오연료를 사용하면 돈도 아끼고, 환경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세계 각국은 수소연료나 태양열연료 등 신에너지 보급 이전 단계로 바이오연료 보급 계획을 앞다퉈 내놓았다.

문제는 그 계획들이었다. 정부가 바이오연료 사용량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옥수수, 유채꽃, 사탕수수 등 바이오연료용 작물들의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각국 정부는 생산량과 예측 수요를 따져봤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예측은 틀렸다. 지금 현재의 낮은 가격은 공급이 수요를 훨씬 앞질러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요공급의 균형 상태까지 보급하겠다는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작물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랴부랴 각국 정부의 바이오연료 도입 계획은 수정 단계에 접어든다. 보급 속도를 늦추고, 바이오연료 사용비율을 줄이는 방식으로 수요 증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때맞춰 경고도 나왔다. 지금처럼 바이오연료용 특화작물에 집중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바이오연료용 작물의 가격이 상승하면, 그 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운반비용 등이 또다른 온실가스 배출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물성 기름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환경산업은 제3의 산업혁명"이라는 구호를 내놨다.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10년 이상 전부터 반복됐던 얘기다. 하지만 제3의 산업혁명의 진행 과정을 보면, 말이 자꾸 앞선다. 인센티브는 아직 불투명하고, 기업과 정부의 계획은 정교하지 못해서 실행단계에서 계속 비틀거린다. 그래도 이쪽이 변화의 방향이란 생각은 든다. 이 혁명은 언제쯤 양질전환을 일으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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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이란 말이 있다. '팡세'의 저자인 그 프랑스인 파스칼이 도대체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봐야 할까? 파스칼은 무조건 신을 믿(는 척 하)는 것이 올바른 의사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1.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할 때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2. 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을 때 잃을 것이 없다.
3.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할 때 얻을 것이 없다.
4.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사람은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을 때 잃을 것이 없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으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잭 그리고 수지 웰치 부부가 최근 비즈니스리뷰에 칼럼을 썼다. 파스칼의 도박에 관한 글이지만, 사실 진짜 주제는 기업들이 지구온난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친환경적인 경영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생산라인을 바꿔야 하고, 관리를 철저히 해야하며, 신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비용은 많이 드는데 효과는 미미하다. 환경문제라는 말만 꺼내면 "그거 돈도 안되잖느냐"며 고개를 내젓는 CEO가 세상에는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치 부부의 해답은 단순명료하다. 친환경 경영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이익이란 것이다. 불과 30년 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미국 기업의 화두로 떠올랐을 때 미국 공장들은 자신들보다 더 싸게 값을 부르는 멕시코와 아시아의 공장을 무시하고는 "우리 기술이 더 뛰어나니까"라는 근거없는 망상 속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일자리도 함께 사라졌다.

미국에 살고 있지 않아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웰치 부부는 그동안 환경론자들의 지구온난화 주장에 대해 '생각보다 과장돼 있을 수 있고,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여왔던 모양이다. 환경론자들의 비난이 꽤 거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환경문제는 캠페인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일어나야 효과를 볼텐데,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효율적인 시스템은 시장경제 아래에 있는 기업들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웰치 부부의 얘기는 꽤나 합리적이고 설득적이다.

비즈니스위크 원문은 유료회원이 아니라 그런지 못 구하겠고, 발췌문은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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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는 모두가 '쇼'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터미네이터'가 공화당 간판을 달고 2003년 민주당의 텃밭인 캘리포니아에서 정치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민주당의 위기와 캘리포니아의 자유주의 전통의 위기에 몸서리를 쳤다. 캘리포니아는 '기회의 땅 미국'의 상징과 같았다.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고, 쓸데없는 권위와 허례허식을 경멸하는 그 전통 말이다. 물론 아놀드는 이민자였고, 평등한 기회를 이용해 미국 사회 주류로 진입한 인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그의 막대한 재산과 어눌한 액센트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집권하자마자 친환경정책을 들고 나왔다. 역시 비웃음을 사기 딱 좋았다. 정치적 '쇼'로만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2004년에는 GM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비효율적이고 반환경적인 자동차'로 꼽히는 '허머 H2'(미군용 '험비' 트럭의 민간버전)를 수소자동차로 개량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남성적인 차를 타도 충분히 친환경적일 수 있다"면서. 영화배우 아놀드가 만들어낸 이벤트, 그때만 해도 그들은 그렇게 '터미네이터식 정치'를 비판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2020년까지 25% 이상 의무적으로 감축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터미네이터는 이를 귓등으로 흘려 듣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고, 대신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기후변화 관련 정책 협의에 협력하기로 손을 잡았다. 그에게는 이념이란 게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화당원들은 배신감마저 느껴야 했다.

환경 정책 이외에서도 이런 점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하는 공화당원인 동시에,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보건복지 예산에 주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공화당원이다. 이는 모두 전통적인 민주당의 가치들이다. "난 공화당을 대표해 주지사가 된 것이 아니다. 난 나를 뽑아준 유권자를 대표해 주지사가 됐다." 이런 말을 일삼는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의 골칫거리다. 하지만 동시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겐 축복이다. 미래에서 날아와 존 코너를 지켜주는 터미네이터처럼, 아놀드의 행보는 동시대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그는 '민주당의 텃밭'에서 지난해 재선에 성공했다.

"더 많은 차를 만들고, 더 많이 차를 타도 좋다. 다만 친환경차를 타고, 기업은 연료효율적인 차를 만들어야 한다."

아놀드의 환경정책 이념에는 사실 문제가 좀 있다. 기술 발전에 대한 그의 맹신에 가까운, 어쩌면 표를 의식한 듯한 신념은 앨 고어같은 사람들의 '적게 쓰고 덜 편리하게 사는' 환경정책 이념과는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아놀드보다는 앨 고어의 정책이 사실 더 친환경적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앨 고어의 환경다큐멘터리 영화)은 정말 불편하다. 정통 민주당원의 눈에 아놀드는 그저 무임승차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와이어드 매거진은 '2007 Rave Award' 수상자로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뽑았다. 말 그대로, 미국인들은 지금 터미네이터의 쇼에 열광(rave)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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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로울링의 해리포터를 이해해야 지구적 불평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 블로그에 링크돼 있기도 한, Marginal Revolution의 Alex Tabarrok이 최근에 올린 포스팅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진행되면서, 유명 작가의 책이 전 세계 각국의 말로 번역돼 나가고, 그에 따라 사상 첫 억만장자(Billionaire)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지은 호머도,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심지어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조차도 억만장자의 위업은 달성하지 못했다.

호머가 돈을 벌지 못한 건 책을 인쇄하질 못하니 말로 얘기를 들려줘야 했기 때문에 시장 자체가 협소해서였다. 셰익스피어도 시장을 늘려보려고 희곡을 써서 관객을 모아봤지만, 그래봐야 하룻밤에 수천명 수준일 뿐이다. 진정한 '베스트 셀러' 문필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톨킨 이후의 세대 정도다. 이들은 책을 대량으로 찍어 팔고, 영화와 만화 등에 판권을 팔아 넘기면서 백만장자가 됐다. 그런데, 롤링 앞에서는 우스울 따름이다. 롤링은 중국 어린이들에게 해리 포터 대신 '하리 보테'의 마법을 팔아 치우고, 한국 어린이들에게 허마이오니 대신 '헤르미온느'의 영특함을 가르친다. 그것도 출간과 거의 동시에.

문제는 톨킨은 시장을 만들어내면서 성공했지만, 롤링은 시장을 빼앗으면서 성공했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책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란 건 한정돼 있게 마련이다. 특히나 비디오 게임과 TV 등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 요즘 세상에선 책이 갖고 있는 유한한 시간이란 건 제한적인 시장을 만드는 가장 큰 요소다. 그런데 예전같으면 찾아볼 일도 없었을 영국 작가의 책이 중국과 한국 어린이들의 독서 시간을 빼앗는다. 롤링은 그만그만한 각국 작가들의 시장을 빼앗아 자신이 독식하면서 억만장자의 위업을 이룬 것이다.

이런 불평등함이 과연 도서 시장만의 일일까? 요즘 싸이월드가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네티즌들이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냥 디카로 사진을 찍어 싸이에 올리면 됐는데, 요새는 블로깅을 위해 꾸준히 포스팅도 해야 하고, 태깅도 해야 한다. 단순히 사진만 찍어 올리던 시기도 지나서 요새는 동영상을 찍어서 유튜브나 판도라TV에 올려야 하는 시대가 됐다. 글도 대충 쓰면 안 된다. 자기만의 주제가 있어야 스타 블로거가 된다. 전에는 싸이의 친구들이 내 고객이었지만, 요새는 불특정 블로거들이 내 고객의 범주에 포함됐다.

미니홈피에서 인기를 누리는 과거의 '싸이월드 투멤(오늘의 멤버; today's member)'들은 방문자가 수백명에서 많으면 수천명 수준에 이르곤 했다. 사람들은 투멤들의 미니홈피에 끝없이 달린 댓글에 감탄했고, 너도나도 투멤이 되고 싶어했다. 요즘엔 다르다. 투멤 따위는 우스울 따름이다. 인기 블로거의 블로그에는 아무 포스팅이 없어도 하루 수천명이 찾아든다. 1일 방문자가 수만명에 이르는 포스팅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하루 2명의 투멤들이 겹치기 없이 나눠갖던 사이좋은 방문자들이 최근에는 '인기 블로거' 몇 명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블로그가 활성화될수록 이런 경향은 더 늘어날 게 뻔하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만의 일일까? 불평등은 도처에 있다. 그것의 원인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이든, 웹2.0이든 관계없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경쟁이란 건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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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머리2007. 4. 2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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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레마두라는 스페인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건조하고, 더위가 멈추지 않으며, 추울 땐 가차없는 곳. 어원을 따져보면 EXTREMADURA라는 말 자체가 '지나치게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 이런 험악한 곳에서 성숙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코르테 레알은 엑스트레마두라와 상당히 닮아 있다. (사실은, 엑스트레마두라 산 와인이란 표시만 보고 별 생각없이 골라 들었다.) 밸런스가 무척 좋은데, 그것도 적당히 자리잡은 밸런스가 아니라 아주 강한 서로 다른 특징들이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만들어낸 밸런스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와인은 타협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지긋지긋한 전쟁 끝의 종전협정과 같다. 그렇다보니 딱히 흠을 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일관 느껴진다.

그런데도, 뭔가 아쉽다. 좋은 향과 부드러운 첫 느낌, 목을 넘길 때까지의 맛은 그랑크뤼 3~4등급 정도는 우스워 보일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뒷 맛이 씁쓸하고 시다. 덜 숙성된 것도, 산화가 된 것도 아닌 포도 자체의 신맛 같은데 몹시 거슬린다. 사실 거슬린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거슬리는 신맛은 아니다. 그래도 너무 완벽한 긴장이 한 순간에 깨어지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소매점 가격이 2만 원 대. 가격 대비로는 거의 최고급에 속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인데, 불행히도 마지막 뒤끝이 사람들의 인상을 구긴 모양이다. 별로 샵에서 인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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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노가 자랑하는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한국에서의 인기는 거의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이 20달러를 넘지 않으며(일반적으로 13~14$에 팔리는 듯) 국내 수입가격도 거품을 대충 제거하면 2만원대 초반(또는 2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

더구나 키안티 클라시코다. 저 욕심많고, 따지기 좋아하며, 혼자만 잘 되려고 하는 (한국인과 아주 흡사한) 이탈리아 포도 농부들이 싸우고 싸워 따낸 것이 키안티 '클라시코'다. 근처에 있다고 다 키안티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안동 반경 50km 이내에서 안동소주를 만든다고 그게 과연 진짜 안동소주겠느냐는 것과 같은 논리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클라시코'는 '원조'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_-;) 루피노 산테다메 키안티 클라시코 DOCG 2004. 이름으로도 기가 죽을 지경이다.

열어서 잔에 따르고는 강한 신맛을 느꼈다. 산지오베제가 원래 그렇지 뭐, 100%라는데...라고 넘기려고 했지만, 병을 열어둔지 1시간이 지나도록 신맛이 순해지질 않는다. 아니, 더 튄다. 2004년산이라고 참아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서 좀 거칠게 잔을 흔들어도 보고, 기다려도 봤다. 향과 입안에서의 느낌은 괜찮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맛이 튀느냔 말이다. 오히려 처음 코르크를 열고 30분 정도까지의 신 맛이 조화롭다고 느껴질 정도다. 좀 오래 열어뒀다고 해서 산화를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보니까, 이 와인의 수입원인 금양인터내셔널이 엄청나게 루피노 와인을 밀고 있는 모양이다.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가가 4만원대라고 해서 루피노의 키안티 클라시코 DOCG가 4만원 가치를 하진 못했으니까. 보관상태가 몹시 안 좋았던 것 같은 얼마전에 골랐던 트라피체 말벡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배에 담아서 대충 건너온다고 해도, 좀 더 신경을 쓰시지. 산지에서 농부나 양조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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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년 안에 지구가 망할 것처럼 과학자들과 환경론자들이 떠들어대도, 정작 그 환경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수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은 '녹색의 비즈니스'라는 블로그를 운영한다. 그 가운데 한 포스팅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무심한 가장 큰 이유는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논리처럼 환경 문제란 다음 와 현재 세대의 갈등이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설명도 이유 가운데 하나지만, 이 글이 내세우는 논리는 더 끔찍하다. 그러니까, 지금 산업화가 잘 돼 온실가스도 가장 많이 내뿜으면서, 정작 선진국으로서의 과실은 다 따 먹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환경이 더 나아지는 걸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온 상승으로 인해 온대 기후가 아열대 기후로 변해 가면서 미국과 캐나다의 곡물 수확량은 현재보다 계속 늘어날 것이고, 추운 북유럽도 더 긴 여름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나 중국, 서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수혜를 입게 될 예정이며, 자연스레 한국 또한 아열대 기후의 혜택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동안 기후 증가로 인해 우리가 손해를 본 것은 말라리아 발병 정도였고, 이익을 본 것은 더 긴 여름과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난방비 절감, 곡물 수확량 증가, 관광산업에 대한 혜택 등이었다. 뚜렷한 4계절이 사라졌다고 불평할 수야 있겠지만, 추운 겨울이 많이 줄어든 것은 확실히 활동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한국은 황사 피해를 점점 더 보고 있긴 하지만, 황사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정작 끔찍한 건 피해를 보는 국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산업화에도 뒤떨어졌고, 경제 수준도 몹시 낙후된 아프리카 국가들이라는 것. 이런 국가들은 사막화가 늘어나면서 기아가 더욱 심해지고,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생산해내는 나라들은 기후변화의 혜택을 (단기적으로) 보고, 온실가스를 적게 생산하는 지리적 약자들은 기후변화의 피해를 가장 먼저 본다. 세상은 지나치게 불공평하다. 도대체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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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graph by Dwight Eschliman for The New York Times ------------------- Carin Goldberg (a homage to Rachel Carson)

"일자리, 기온 그리고 테러. 오늘날 미국인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세가지 이슈."

이번주 뉴욕타임즈의 타임즈매거진 커버스토리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긴 칼럼, '녹색의 힘'이었다. 평소같으면야 긴 칼럼을 읽기가 골치아파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곤 하지만 이번 커버스토리에는 눈길이 가는 구절이 굉장히 많다.

우선 일자리. 이에 관해 얼마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속가능경영에 관해 대화하던 중이었는데, 불현듯 함께 얘기를 나누던 분이 "지속가능경영 또는 환경경영이 제2의 산업혁명을 가져올지 모른다"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별 뜻 없이 넘겼지만, 이 칼럼을 읽고 있자니 생그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9/11과 카트리나를 겪은 미국인들이 변하기 시작하면 산업 자체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프리드먼은 미국이 그동안 철도 대신 도로를 깔고,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수준의 휘발유를 팔아 온 국민에게 자동차와 쾌적한 교외 거주환경, 낮은 인구밀도를 선물했다고 말한다. 이런 미국의 모델은 전 세계가 선망한 모델이었다. 그러니 미국이 친환경적인 산업을 개발해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낸다면 세계는 그 또한 모델로 받아들이고 따라올 것이라는 얘기다.

기온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세계 곳곳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가 쏟아져 나온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로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경고론자에게 돌을 던진다. "당신들의 지구 온난화 경고는 근거가 없다"면서.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이란 건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더 이상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 지속되기 힘들고, 더 이상 자원 착취적인 발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게다가 세계가 칭송하는 중국이 미국식으로 산업화될 경우 생길 환경재앙이란 건 중국인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황사를 들이마시는 한국인들은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테러라는 이슈는 이런 문제를 뻔히 알면서도 미국이 저지르는 양면적인 행위에 관한 지적이다. 미국인들은 달러를 벌어서 군대를 유지하고, 테러와 전쟁을 벌이도록 위임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석유를 사들이면서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이슬람 종파 일부의 부를 축적해 그들에게 무장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한 때, 잠시나마 풍요롭고 행복했던 세계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름 때문에 분쟁을 벌이고, 에너지 쇄국에 나섰으며, 전쟁도 불사하기 시작했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친환경산업에 투자하면 된다. 그런데 왜 하지 못하는 걸까? 프리드먼의 분석은 굉장히 간단하다. 계급갈등은 적이 명확하고 아군도 명확하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갈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젠가 태어날 테고,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이익집단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제는 그 때가 되면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다는 데 있다.

좋은 칼럼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미국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대체에너지 개발과 에너지효율이 높은 상품 생산 등의 친환경산업은 이미 앞선 기업들의 트렌드가 됐다. 그런데 지금 한국기업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일본의 도요타는 세계 1위 자동차회사가 아니었지만, 가장 먼저 하이브리드카를 상용화한 회사가 됐다. 그게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아닐까? 소니와 필립스와 인텔은 환경기준을 맞추지 못한 납품업체에게서는 부품을 공급받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그 연합체에 포함돼 있지 못하다. 과연 한국은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아직도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의 갈등만 해결하면 된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건 아닐까?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4. 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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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저 XX인데요~~~"
오늘 아침에 전화를 받았다. 대학 후배였다. 얘기인즉슨 훌륭한 명문 기업인의 딸로 자라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최근 사법연수원을 졸업해 멋진 로펌에 입사했다는 것이었다. 뭐, 그 정도야 주위의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 한둘 쯤 모두 있는 법이니 그러니저러니 했다. 약간 부럽지만,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런데, 얘기가 이어졌다.
"저 이번에 디지털 싱글 냈거든요. 아시죠? 디싱."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가수가 됐다. 정식으로 음반을 낸, 아니 요새는 음악이 나오는 접시 따위는 없으니 정식으로 '디싱을 낸' 가수라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가수다.

다른 후배 한 녀석은 사법고시를 붙어놓고도 연수원에 갈 생각은 않고 미용실을 개업하고, 인터넷 사업을 벌이는 등 정신이 없다. 내 눈에는 하루종일 노는 것으로만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놀아도 벌이가 괜찮은 모양이다. 20대의 새파란 나이에 그 녀석은 사장님이 됐다.

대학에 갓 입학했던 나를 끌고 이것저것 빨간 사상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던 한 선배는 결혼을 하더니 부인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자연친화적인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그 과정을 책으로 써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TV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소개도 됐다더라.

대학 때 함께 술 마시던 선배는 야구가 너무 좋아 야구 기자가 되더니 야구 책을 번역하겠다고 두꺼운 원서를 옆에 끼고 다닌다. 뭘 해먹고 살까 걱정하며 자리에 누워 술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던 친구녀석은 매형과 함께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해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오지랍이 넓어 정작 제 앞가림은 못할 것 같았던 또 다른 친구는 그 오지랍 덕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꽤 인정받는 국제문제 전문기자로 성장하는 중이다.

여기서 난 내게 묻는다. 너는 뭐냐.

나이 서른. 조금씩 뭔가를 이뤄가기 위해 뭔가를 버려나가야 할 때다. 가수가 된 그녀가 뻣뻣함을 버리고, 사장님이 된 그녀석이 어깨에 넣을 수 있는 힘을 버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선배가 안빈낙도를 버리고, 야구기자 선배가 출세와 술자리를 버리고, 장난감 장수 친구가 안정된 삶을 버리고, 오지랍넓은 기자 친구가 사생활을 버렸듯이.

다시 내게 묻는다. 그 무엇인가를 버리고, 정말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Posted by 흰솔
토끼머리2007. 4. 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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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hn Marck

1973년 4월 8일, 파블로 피카소가 죽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허름한 카페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돈이 없어서 그려놓은 작품을 불에 태워 난방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허름한 카페 'Els 4 Gats'는 지금 람블라스 거리의 관광명소가 됐고, 그의 작품은 현재 수천만 달러에도 거래가 된다.

그는 생전에 프랑스 공산당의 충성스러운 당원이었지만, 가장 부유한 화가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고, 게르니카 지방에 떨어진 폭탄의 참상은 강렬한 그림으로 그려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고향인 카탈루니아의 민족 문제에는 별로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랑이 예술혼의 원천이라면서 3명의 부인에게서 4명의 자녀를 뒀고, 말년까지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몹시도 유명세를 탔다. 그의 고생은 젊어서 잠시. 이후에는 한 번 얻은 유명세로 말년까지 풍요로운 삶을 보낸다. 그의 유명세의 원천은 아마도 그와 교류했던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파리 시절 만났던 앙드레 브레통, 기욤 아폴리네르, 거르투르드 스타인, 장 콕토까지.

그의 죽음도 그랬다. 아내와 함께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던 그는, "나를 위해 잔을 들게, 나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들게. 나는 더 이상 잔을 들지 못한다네"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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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1년 뒤 4월 8일. 이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시애틀, '워싱턴 호수' 옆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머리를 향해 샷건의 방아쇠를 당긴 채로.

그는 어린 시절 비틀즈의 노래를 멋드러지게 불러 인기를 끌었던 아이였지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로는 수많은 위태로운 청소년 가운데 하나로 자란다. 운동은 하기 싫어했고,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썼으며, 게이 친구들과 친하게 어울렸던 탓에 '호모'라며 손가락질을 당하곤 했다.

코베인은 한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었고, 그의 주위에는 늘 인디 음악계의 음울한 친구들만이 가득했다. 잘 나가는 밴드라고 볼 수도 있었고, 인기도 꽤 있는 편이라 애인도 여럿 있었지만, 그래봐야 활동무대는 시골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단 한 명. 아내 커트니 러브 뿐이었다.

메이저 레코드사인 게펜에서 음반을 내면서 그는 갑자기 주류가 됐다. 음울하고, 이상하고, 어딘가 불량스럽고 반항적인 이 젊은이는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스타가 됐고, '비틀즈를 흉내낸 곡에 내가 쓴 시를 붙였을 뿐'이라고 말했던 노래들은 세계적으로 수천만장이 팔려나갔다. 결국 그는 모든 걸 견디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Posted by 흰솔